“다섯 개의 화살”, “다섯 개의 이름”, “다섯 번의 결혼”카드게임에서 피(皮)는 별로 쓰임새가 없지만 다섯 장이 모이면 최강의 패가 되기도 한다. 로스차일드는 “다섯 개의 화살”의 유언으로 200년 이상 가족을 결속시켰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섯 개의 이름”으로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제정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다섯 번의 결혼”을 통해 자신은 물론 그와 상대한 남자 모두를 비운의 길로 몰아넣었다.

“다섯 개의 화살”로, 다섯 형제의 화합을 이끈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은 독일 유대계 혈통으로 1750년부터 지금까지 8대, 250여년에 걸쳐 세계 최대 금융업계를 지켜오고 있는 신화적인 가문이다. 이들 가문은 오스트리아와 영국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까지 받았다. 가문을 일으킨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1744-1812)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고리대금업을 시작으로, 다섯 아들과 함께 나폴레옹 때부터 제 1,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부를 이어오고 있다. 로스차일드와 다섯 그의 아들이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는 총 자산은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지만 전문가들은 대략 미국 GDP의 2.5배(약50조 달러)정도 된다고 추정하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우선, 금융업에만 주력하여 한 우물을 팠다. 또한 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을 유럽 각지에 보내 은행을 설립하게 하고 그 정보네트워크를 활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 간의 화합과 결속이다. 가족 간의 화합은 250여 년 동안 로스차일드가의 트레이드마크이다. 로스차일드는 1812년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이미 세상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로스차일드가 다섯 자녀들에게 남긴 유언은 기원전 6세기 카스피 해에서 강대한 국가를 건설했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 왕이 그의 다섯 자녀들에게 남긴 “다섯 개의 화살”에 대한 유언과 같은 것이었다. 스키타이 왕은 그의 다섯 자녀들을 불러 모은 후에 다섯 개의 화살을 내밀며 그것을 꺾어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무도 그것을 꺾지 못하자 다음에는 화살을 하나씩 주어 꺾어 보게 했다. 이번에는 모두 쉽게 부러뜨렸다. 그러자 그는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이 마음을 합하면 누구나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지만, 흩어지면 쉽게 끝날 것이다. 형제간에 화합하라.” 스키타이의 왕이 자녀들에게 유언한 “다섯 개의 화살”이야기는 이후 12세기 몽골제국을 세우고 유럽을 정벌하여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스칸(1162-1227)이 그의 다섯 아들에게 “다섯 개의 화살”이야기를 반복했다는 점에서 더욱 유명해 졌다. 로스차일드가의 형제들은 후손이 아버지의 유지를 지킬 수 있도록 다섯 개의 화살을 움켜쥔 손을 가문의 문장에 그려 넣었다. 다섯 개의 화살은 유럽 각지로 흩어져 은행들과 다섯 명의 아들, 암셸, 잘로몬, 네이선, 카를, 제임스를 뜻한다. 로스차일드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지났지만, 그의 후손과 가문은 로스차일드의 “다섯 개의 화살”의 유언을 8대째 지키며 이어가고 있다.

“다섯 개의 이름”으로, 로마황제가 된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섯 개의 이름”으로 황제가 된 사람이다. 그는 원로원에게 모든 실권을 넘겨주고 “칭호”만 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원로원으로부터 부여 받은 칭호만 자그마치 다섯 개나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1인자”, “호민권”, “전군 사령관”, 그리고 “황제”라는 칭호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스러운”이란 뜻으로 정치적인 특권이 전혀 없는 단순한 존칭일 뿐이다. 하지만 카드게임에서 쓸모없는 피(皮)라도 “다섯 장”이 모이면 비장의 카드가 되듯, 실권 없는 다섯 개의 칭호는 훗날 로마 초대황제가 되는 최강의 패가 되었다. 기원전 27년 1월13일, 시저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된 18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티누스)는 원로원 앞에서 놀라운 선언을 했다.
“내 일신에 집중 되어 있는 모든 권력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다시 되돌려 드릴 것을 선언한다.”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가 시저의 유언대로 후계자가 되어 종신 독재관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 아닐까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모든 권력을 원로원과 시민에게 되돌린다는 예상 밖의 선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자신의 속내를 감춘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를 공화정으로 되돌릴 생각도, 원로원에 권력을 내 줄 생각도 전혀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로마는 또다시 내란과 혼미의 시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원로원들은 생각지도 못한 옥타비아누스의 “선물”을 받고 미친 듯이 환호하며 그에게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칭호를 주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후 겉으로 실권이 전혀 없어 보이는 명칭들을 하나 둘씩 얻었고, 이윽고 다섯 개나 되는 명칭을 원로원으로부터 그것도 합법적으로 수여 받았다. 역사가 타키투스가 말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원로원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나씩 권력을 손에 넣어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치 카드게임에서 한두 장 일 때는 시시한 카드지만 “다섯 장이 모이면 최강의 패”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원로원조차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름들을 모았다. 결과는 카드게임과 같이 되고 말았다. 로마사의 권위자 프랭크 애드콕 교수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렉산더나 시저처럼 압도적인 지성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기의 세계는 바로 그와 같은 인물을 필요로 했다.”

“다섯 번의 결혼”으로, 이집트와 로마를 지배하려 한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B.C. 69-30)의 코가 1센티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는 다시 쓰였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파스칼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클레오파트라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책략가로, 그녀를 둘러싼 진실과 오해는 지난 2천년 동안 빛과 그림자처럼 극명하게 나누어져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권력의 발판으로, 때론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할 만큼 용의주도했다. “나일강의 마녀”라고 불리기도 한 클레오파트라는 불과 15살 때 연하의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14세와 결혼했다. 그 후 시저와 안토니우스 그리고 시저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등과 다섯 차례나 결혼했다. 갈리아(프랑스)와 게르마니아를 비롯 무려 800여 개의 도시를 정복하고 300여 종족을 평정하여 역사가들에 의해 “고대 서양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은 율리우스 시저(B.C.102-44)마저 그녀의 계략에 빠져 들었을 정도였다.

시저의 사후, 로마는 기마 대장이었던안토니우스와 시저의 양자인옥타비아누스의 양분체제에 놓이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이집트를 위해 당시 더 강력한 세력을 가진 안토니우스를 택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철저하게 자신의 노예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결혼 이후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엄청난 이권이 걸린 동방의 통치권까지 넘겨주었다. 더욱이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 때에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 편에 서서 조국의 사령관인 옥타비아누스와 싸우는 길을 택했다. 조국을 버리고 한 여인을 선택한 로마의 장군, 한 여인 때문에 조국과 싸운 안토니우스의 선택은 최악의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녀와 만났던 영웅들,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포함 모든 남자들이 한결같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클레오파트라 모든 것을 동원하여 영웅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음에도 야망을 펼쳐보지 못하고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찰톤 헤스톤이 감독한 영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그녀의 최후는 독뱀에 물려 죽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가 “플루타르크”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고 이후 셰익스피어 등 수많은 작가의 극화로 거의 정설처럼 자리 잡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결혼한 다섯 남자들 가운데, 안토니우스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안토니우스 또한 이집트에 묻어달라는 유언장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