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미스해전, 칼레해전, 트라팔가해전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 3대 해전은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해전과 1588년 영국과 스페인과의 칼레해전, 그리고 1805년,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과의 트라팔가해전을 말한다. 세계 3대 해전은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 놓은 것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프랭클린은 “좋은 전쟁 또는 나쁜 평화는 없다.”라고 전쟁을 미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리스, 살라미스해전에서 골리앗을 무너뜨리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운명을 바꿔 놓은 살라미스 해전은, 영화 “300”으로도 유명한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와 이어진 해전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 정복을 위해 총 세 차례에 걸친 원정 전쟁을 감행했다. BC 492년, 1차 원정은 페르시아 함대가 폭풍을 만나 좌절되었고, 2년 후, 2차 원정은 마라톤 전투에서 패했다.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가 페르시아 군대를 무찔렀을 때에 그리스의 한 병사가 아테네까지 약 40km를 달려 승전보를 전한 후 사망하자, 이를 기념해 마라톤 경주를 만들었다는 유명한 전투이다. 그리고 BC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세 번째로 7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하였지만 살라미스해전에서 그리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살라미스해전은 해전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 중 하나로,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3개 대륙에서 20만 여 명이 동시에 투입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투였다. 헤겔은 “역사상 살라미스해전만큼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아무도 승리할 줄 예상하지 못했듯이,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이길 줄 아무도 몰랐다.
페르시아전쟁 후 아테네 서정시인 “시모니데스”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산화한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을 기념하는 시를 남겼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스파르타 인에게 전하라. 그들은 명령에 따라 여기 누워 있다고…” 기원 후 1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철학자 “아폴로니우스” 또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바로 이곳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희생하고…기념비를 이곳에 세웠기 때문이다.” 빅터 데이비드 핸슨 교수는 그리스가 살라미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대하여 “그리스 시민은 왕이나 사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위해 싸우기 때문에 더 뛰어난 전사가 될 수 있었지만, 페르시아군은 전제 군주를 위한 노예였으므로 패배했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리스는 도시국가들과 동맹을 결성하여 살라미스해전에서 승리하였지만, 곧 동맹이 붕괴되었고 30년에 걸친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 때에 마케도니아에게 패하여 속국이 되었다. 역사학자인 사무엘 헌팅턴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은 서구와 이슬람이 최초로 충돌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영국, 갈레해전에서 무적함대를 무찌르다.
일반적으로 스페인의 축구 국가 대표 팀을 칭할 때 “무적함대”라고 부르곤 한다. 이것은 갈레해전 이전까지 스페인이 보유했던 함대가 “무적함대”로 불릴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갈레해전은 1588년 영국함대가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승리한 해전을 말한다. 콜럼버스 이후 15세기 말의 바다는 스페인의 것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페인은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으로 해군력을 강화하여 모든 제해권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당시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나폴리, 밀라노, 시칠리아,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로마교에 입각한 종교적인 전제정치를 강화하였다. 특히 펠리페 2세는 군대를 파견하여 네덜란드의 개신교도 8천여 명을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합법적으로 학살까지 감행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영국의 지원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던 펠리페 2세는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와 함께 영국을 정벌하기에 이르렀다.
영국해군은 찰스하워드 제독이 지휘했고, 스페인은 메디나 시도니아 제독이 지휘했다. 칼레해전은 한 마디로 영국과 스페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여왕과의 신, 구교 종교전쟁이라 할만하다. 칼레해전은 대포를 동원한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될 뿐만 아니라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침 시킨 사건은 해상전술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영국은 세계 최강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스페인령이었던 미국을 비롯하여 인도, 필리핀 등 남부 아시아까지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나아가 칼레해전의 승리는 후일 트라팔가해전에서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해적에 불과했던 “드레이크”를 귀족 신분인 “드레이크 경”으로 격상시켜 해군제독으로 임명했다. “드레이크”는 갈레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함으로 영웅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일 영국 민간설화와 수많은 서사시와 문학작품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H.D.F 키토는 칼레해전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과 비슷하다고 서술하였다. “에게 해 연안의 작은 도시국가인 아테네가 대제국 페르시아를 무찌름으로써 얻게 된 번영과 작은 섬나라 영국이 대강국 스페인을 저지함으로써 해상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은 같은 맥락이었다.”
넬슨, 트라팔가해전에서 나폴레옹의 세계제패를 좌절시킨다.
2016년 6월23일, 영국은 스스로 유럽 대륙에서 이탈했다. 유럽공동체(EU)에서 탈퇴하는 이른바 “브렉시트”를 감행했다. 이에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연합은 “헤어지려면 빨리 헤어지자”라며 영국에 대하여 “대륙봉쇄령”도 불사할 태도였다. 그런데 지금부터 210년 전인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은 반대로 영국과의 통상은 물론 영국함선이 유럽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대륙봉쇄령은 오히려 나폴레옹이 패망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대륙봉쇄령의 첫 이탈자는 러시아였다. 나폴레옹은 배신자 러시아를 혼내주기 위해 대군을 휘몰아 러시아로 쳐들어갔지만 무릎을 꿇고 되돌아왔다.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린 배경은 바로 1년 전인, 1805년 트라팔가해전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1805년 스페인의 해안 트라팔가에서 넬슨은 교전 중 피격당한 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트라팔가해전(Battle of Trafalgar)은 1805년 10월21일 스페인 남서 해안 트라팔가 해안에서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 해전을 말한다. 당시 나폴레옹은 유럽을 장악했으나 영국에 제해권을 빼앗겨 해상 봉쇄를 당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해전은 나폴레옹이 영국을 공략하고 해외진출을 꾀하기 위해 불가피했다. 그러나 영국군에 의해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는 거의 괴멸되었고, 14,000여명의 사상자를 냄으로 종결되었다. 트라팔가해전에서 나폴레옹의 패배는 세계제패에 대한 나폴레옹의 꿈을 좌절시킨 결과가 되었고, 영국은 트라팔가해전 이후 약 100년 간 전 세계 제해권을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었다.
영국은 1850년대 이후 전 세계 철강의 70퍼센트, 면직의 50퍼센트가 영국의 제품이었다. 또 전 세계 상선의 30퍼센트가 영국의 소유였고, 세계 금융자본의 90퍼센트가 파운드화로 결제되었다. 영국은 지금껏 파운드화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나 최근 “브렉시트”를 감행한 것은 모두 빅토리아 시대이후부터 갖고 있는 대영제국의 옛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살라미스해전은 그리스가 대제국 페르시아로부터 그리스 문명을 지켜내고, 동방이 서방의 침입을 좌절시킨 전투였다. 살라미스해전 후 세계 역사의 주도권은 동방이 아닌 서방이 잡게 됐다. 칼레해전은 영국이 최강국인 스페인을 몰락시킴으로, 작은 섬나라에서 전 세계무대로 영토를 넓히는 분깃점이 되었다. 그리고 트라팔가해전은 나폴레옹의 세계 제패를 좌절시키고, 영국이 제해권을 거머쥐는 최강자 국가로 도약하게 된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