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시편116 : 12-19
제목 :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 /2021. 6. 6
시편 116편은 회복의 시입니다. 1절에서 7절까지 사망, 스올, 환난, 슬픔, 눈물, 고통이란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다가 (8절)“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회복된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회복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회복입니다.
(12절)“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깨닫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한두 가지 은혜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많은 은혜를 깨달은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3절)환난과 슬픔을 만나 기도하였을 때 응답해 주신 은혜를 깨달았으며, (6절)어려울 때 나를 건져 주신 은혜를, (8절)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넘어짐에서 건져주신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창세기 8장, 노아는 홍수 후 물이 감한 여부를 알기 위해 방주에서 까마귀를 날려 보냈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내자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7일 후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내자 저녁때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노아와 가족은 비둘기가 물고 온 새 감람 잎사귀를 보고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까마귀와 비둘기는 방주에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비둘기는 노아와 가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까마귀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잘 잊는 사람을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란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또한 받은 은혜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와 메추라기가 이발에 끼여 있는 상태에서 원망하였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가 그토록 크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인이 은혜에 대한 감사를 회복하고자 한 것은 계속하여 은혜 안에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은혜는 매일의 양식과 같아서 계속 공급받지 않으면 우리 삶이 궁핍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대적들로부터 쫓김을 받았을 때, 많은 전쟁을 할 때, 생명의 위험을 느낄 때마다 간절히 기도하였고, 그럴 때마다 기도의 응답을 매번 받았습니다. (시65:2)“기도를 들으시는 주여!”라고
고백하며, 기도응답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회복함으로,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2. 약속을 지키는 삶의 회복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헌신하는 표로 종종 서원하였습니다. “서원”은 약속이란 뜻으로 서약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야곱과 한나, 입다, 그리고 삼손과 세례요한의 부모가 서원하였습니다.
시인도 하나님께 서원하였고, 서원한 것을 지키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14절)“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8절)“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공중 앞에서 약속한 것을 공중 앞에서 지키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서원에 해당하는 서약이나 약속들을 많이 해 왔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서약을 합니다. “여러분은 교인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바르게 이행하며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고 화평과 덕을 세우는데 힘쓰기로 서약하십니까?”
또한 결혼할 때 서약을 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강건하거나 병들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게 되는 모든 경우에서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며, 도와주고 보호할 것을 굳게 서약하십니까?” 서약한 것을 기억합니까?
그리고 직분을 받을 때 서약을 합니다. “직분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힘써 섬기기로 서약하십니까?” 나아가 자녀를 가졌을 때, 사업을 시작할 때 어려울 때, 병중에 하나님과 약속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속들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요즘 일반화되어 있는 “비자카드”는 약속과 신용의 상징입니다. 신용이 없는 사람을“신용불량자”라 부릅니다. 신용불량자는 환영받지 못합니다. 자신과의 약속 뿐 아니라, 사람과의 약속, 나아가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잊지 않고, 꼭 지킬 수 있도록 힘쓰길 소망합니다.
3. 경건한 삶의 회복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에게 있는 죽음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죽음은 쏘는 것이요, 아픈 것이요, 죄의 결과”이며, 슬픈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성도의 죽음조차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15절)“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계14:13)“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두 가지 주목할 것은 “귀중한”이란 말입니다. “보석이나 왕 같다.”라는 의미이며, “그의 경건한 자들”이란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 성도” 가리킵니다. 여기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에게 속한 성도의 죽음은 “보석과 왕과 같이 존귀하다.” 뜻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죽음이 보석이나 왕과 같이 존귀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기뻐하고 찬양했던 큰 두 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죽음을 찬양하며 기뻐한 사건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에게 사망과 죽음이 임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른,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기쁜 날이었고, 구원의 날입니다. 동시에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 받은 날이었습니다.
둘째로, 성만찬 사건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죽음을 앞두고 만찬을 하였습니다. 누가 죽음을 앞두고 사람을 초대하여 식사를 합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자신에게 고통이지만,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유월절과 성만찬은 죽음 앞에서 기뻐한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시인도 죽음 앞에서 축배를 들은 것입니다. (13절)“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고백합니다.
우리가 경건한 삶,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보다, 강력한 회복이 없습니다. 경건은 사망과 스올, 환난과 슬픔, 눈물에서 일어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감사와 약속, 경건한 삶을 회복함으로 역경과 환난, 죽음까지도 극복한 것처럼, 저와 여러분 또한, 은혜와 약속과 경건한 삶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