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Amistad”, “Freedom”, “Amazing Grace”
세 편의 영화, “아미스타드”, “프리덤”, 그리고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특징은 역사적인 사실을 소재로 하여 만든 점이다. 실제 “아미스타드 호”사건은 미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음은 물론, 노예폐지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프리덤”은 존 뉴턴의 삶을 다루고 있으며, 그리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국의 노예무역제도를 폐지하게 만든 윌버포스의 처절한 삶을 그리고 있다.
“흑인은 화물이 아니며, 자유인이다.”, “아미스타드”
“아미스타드”(La Amistad)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스페인 노예무역선 “아미스타드 호”에 얽힌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이다. 영화는 노예거래의 잔인성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흑인들과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려는 서구인들과의 투쟁 등을 그리고 있다. 1839년 6월27일, “아미스타드 호”는 흑인 노예 56명을 태우고 쿠바의 하바나 항구를 출발한다. 항구를 출발한지 5일 후 노예들이 선상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멘더어 부족의 싱케이 추장이 반란을 주도 한다. 이들은 모든 선원들을 살해하고 두 명만 살려준다. 흑인 중에는 항해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싱케이는 배를 아프리카로, 해가 뜨는 동쪽으로 가자고 명령한다. 두 달쯤 뒤, 그들은 식수를 보충하기 위해 잠시 육지에 접안한다고 흑인들을 속이고 미국 코네티컷 해안에 정박한다. 노예선은 순찰중인 미국 경비정에 의해 나포되고 만다. 그들은 선상반란 및 살인죄로 기소되어 뉴 헤이븐의 연방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기에 이른다. 1840년 1월 지방법원은 이들은 자유인이므로 미국의 감독 아래 아프리카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스페인을 비롯,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편에서 반발하여 미 연방대법원에 항소하게 된다.
1841년 3월 9일 연방대법원은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아미스타드 호의 흑인들은 어느 나라의 법, 심지어 스페인 법을 적용해도 자유인이며, 불법적으로 체포, 납치, 강제로 수송된 자유민이기에 노예의 신분이나 개인의 재산으로 적용될 수 없다. 본 법정은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들을 화물로 인정할 수 없으며 모두 자유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 1842년, 살아남은 39명의 흑인들은 자유인의 신분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 실제, 아미스타드 호의 사건은 유럽의 노예거래에 대해 경종을 울린 판결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남부와 북부의 의원들은 극단적으로 다른 반응을 보이므로 심각한 국론 분열이 야기되기도 했다. 증가된 국론 분열은 20년 뒤 남북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치른 대가는 아주 컸지만, 노예 해방이란 결실을 얻으므로 그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미국은 남북전쟁중인 1863년에 노예해방 선언이 공표되었고,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발효되었다.
“나 같은 죄인, 잃었던 생명 찾았다.”, “프리덤”
“프리덤”(Freedom)은 100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 두 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 영화이다. 하나는 영국의 노예무역선의 선장이었던 존 뉴턴(1725-1807)의 회심을 그렸고, 다른 하나는 100여년이 지나 노예인 사무엘의 회심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1856년 노예 사무엘이 가족과 함께 노예농장에서 도망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비밀 조직의 도움으로 캐나다로 향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노예 사냥꾼 플림튼의 추적 속에 사무엘의 가족들은 숨 막히는 여정이 이어진다.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과 짐승취급을 받으며 탈출구 없는 도망자의 삶에 지친 사무엘은 “흑인을 위한 신은 없다.”라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위기와 절망에 빠진 사무엘은 자신을 노예로 만든 하나님을 원망하던 중 그의 어머니로부터, 증조부로부터 이어지는 존 뉴턴이 변화된 것과 그가 고백한 “어메이징 그레이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1748년 노예를 가득 실은 배 한척이 미국을 향해 닿을 올린다. 바로 선장인 존 뉴턴이 아프리카 노예들을 미국으로 실어 나르는 노예운반선이다. 그는 노예를 짐승처럼 다루며, 때로 노예가 병 들거나 쓸모없다 싶으면 아무 가책 없이 바다에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향해 도중 폭풍으로 배가 파선 될 순간에 ‘하나님 한번 만 살려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그날 그는 폭풍가운데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후 노예선 선장직을 그만 두고 목사가 되었다. 존 뉴턴은 1772년 지난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라는 노래를 쓰게 된다.”
그런데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사무엘은 뉴턴이 지난 과거를 깊이 회개하고 지은 노래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뉴턴이 노예들의 자유를 위해 남은여생을 바치며 노예 폐지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게 된다. 두 이야기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소재로 하고 있다. 미국 찬송가사전에 따르면,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존 뉴턴의 자전적 삶을 가사화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어로 된 찬송가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고,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찬송가로 꼽힌다. 영화는 하나님의 은혜가 100년이 훨씬 지나고 또 지역의 한계를 넘어 계속 이어지고 중단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프리덤”(자유)은 노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유는 모든 인종, 모든 사람에게 필요로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노예무역 폐지는, 나의 사명이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국의 노예무역 철폐 주역인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의 끈질긴 투쟁을 다루고 있다. 영국은 17세기부터 노예무역을 본격화했으며, 18세기에는 세계 최대의 노예무역국이 되었다. 1770년경 아프리카에서 미국과 유럽으로 팔려가는 노예의 절반 이상이 영국의 노예선이 운반했을 정도였다. 당시 영국은 노예무역으로 먹고 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고, 국가 예산 또한 노예 거래에 의존하고 있었다. 영국 국민들 또한 대다수가 노예무역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극소수만 반대했다. 반대한 극소수 가운데 윌리엄 윌버포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불과 21세에 하원의원이 되었다. 그는 신앙인으로서, 또는 정치가로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닫고, 노예무역제도를 폐지하고 사회에 물든 악습을 개혁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특히 클랙슨, 그랜빌 샤프, 작가인 모어, 성직자 존 벤, 은행가 헨리 손턴 등에게 자문을 구하며, 노예무역 제도폐지를 역설하였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권력의 집단 세력 앞에서 빈번이 무너졌다. 그는 누구보다 노예무역제도를 폐지하는 여러 과정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자 존 뉴턴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뉴턴은 그에게 “하나님께 헌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가진 정치적 영향력으로 불의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노예무역제도 폐지를 국회에 9차례나 발의하는 등, 무려 150차례나 제안하여 좌절되었음에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폐지 운동을 이어나갔다. 무엇보다 그는 “흑인들은 열등한 생물이며, 인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실제로 1792년에는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 “프리타운”을 건설하여 흑인들이 스스로 도시를 직접 운영토록 기획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807년 2월 23일 그가 제출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마침내 통과되었고, 1833년 7월26일에 영국전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는 노예제도가 폐지 된 후 아쉽게도 삼일 후인 7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윌버포스는 노예무역 제도폐지뿐 아니라 사형제 제한, 교도소 환경 개선, 법정 노동시간 규정과 어린이 노동보호법을 통과시켰다. 1787년10월28일, 윌버포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커다란 사명을 주셨다. 그것은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과 이 나라의 관(악)습을 개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