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고린도전서 15:12-20
제목 : 내가 부활을 믿지 못하면
- 3.31(부활주일)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일반상식이나 지식으로 이해될 수 없기에 믿기 어렵지만, 오늘 말씀, “내가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이란 말씀을 통해서 부활을 확신하는 시간 되었으면 합니다.
- 부활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현재 삶이 헛되다.
바울은 15장 전체를 할애하여 헬라사상의 영향으로 부활을 믿지 못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제기하면서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당시 한편에서는 (12절)“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하였고, (35절)“죽은 자들이 어떻게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전자는 부활 자체를 의심하는 질문이며, 후자는 부활을 믿지만, 어떻게 부활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 가운데 특히 지식인으로 불리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3년 동안 주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마저도 부활을 의심하며, 믿지 못하였습니다. (눅24:11)“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허탄”은 “잠꼬대 같은 소리”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독일의 볼트만은 “부활은 2천년 어디선가 만들어진 신화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제자들이 지금도 유럽 각지에서 “부활은 신화”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습니까?
그런데 만약 사람이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고전15:32)“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당시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좀더 먹고 마시고, 즐기자며 향락에 빠졌습니다.
쾌락주의는 기원전 300년, 고대철학자 “에피쿠로스”에 의해 학문적으로 정의 되었지만, 인류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전 세계는 향락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얼마 전 국가 예산의 1/10에 해당하는 돈이 향락산업으로 소비된다고 보도한 바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알코올 중독과 방탕과 향락에 빠지고 있습니까?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전15: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부활신앙은 오늘을 바르게 살아가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부활신앙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부활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무엇을 믿는가?”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돈을 믿고, 자신을 믿고, 권력을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이 중요한 합니다.
(14절)“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참 믿음은 부활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였을 때, 그들이 가진 믿음도 함께 무너졌으며, 어부로 되돌아갔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마와 같이 예수님은 보면 믿겠다고 하며 천국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처음 좋았던 옷이나 물건을 사고 난 후 곧바로 후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애할 때는 예쁘고 마음에 흡족하여 결혼했는데, 곧 “내 눈이 삐었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 어린 시절 고향은 참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양쪽은 산이 평풍처럼 쳐 있고, 앞에는 철새도래지, 주남 저주지에 수많은 철새들이 날아들고, 뒤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며, 봄에는 철쭉이며 진달래가 만발하고, 가을에는 갈대들이 저녁 햇살을 받아 흔들리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에 살다가 한 번씩 가본 고향은 옛 시절과 같은 아름다운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초라하고, 아주 볼 품 없는 시골일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을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눈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유효 기간은 3개월이란 통계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을 믿으시겠습니까?
철학가운데 실증주의란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 콩트가 주장한 것으로 “모든 것을 관찰과 감각, 검증할 수 있는 지식만을 인정”하는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까? (고전15:3)“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부활은 우리 눈으로 확인함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부활”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헛될 뿐 아니라,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길 소망합니다.
- 부활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죽음도 헛되다.
역사를 보는 두 관점이 있는데, 역사가 순환한다는 사관과, 직선적인 사관입니다. 전자는 불교의 사관으로 윤회설이라고 합니다. 후자는 기독교의 역사관으로, 기독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음을 믿습니다. (히9: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주님은 죽음 앞에 슬피 통곡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요11:25-26)“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면, 죽음 앞에 담대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고전15:53)“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롬6:23)“죄의 삯은 사망이요” 죽음은 분명 아픈 것이며, 죄의 결과 온 것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이 죽음의 길을 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8절)“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절)“다만 이 세상 삶뿐이면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만이 환난을 이기고, 죽음까지 이기게 합니다. 세례요한과 스데반 부활을 확신하였기에 죽음을 두려워 않았고,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죽음 앞에 반드시 서야 합니다. 왕도 영웅, 장군도 죽음 앞에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것은 부활신앙입니다. (계14:13)“주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도다.”(시116:15)“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현재의 삶이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죽음도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20절)“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나의 부활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