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누가복음 23:39-43
제목 : 십자가에 담긴 뜻
- 3. 24(종려주일)
오늘은 고난주간의 시작과 종려주일입니다.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라 부릅니다. 십자가에는 무궁무진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해 “십자가에 담긴 뜻”이란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십자가는 용서의 표시입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13개 세멘떼리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오도넬에 있는 “알무데나”세멘떼리오로,
현재 500만구 이상의 무덤이 있는데, 이는 현재 마드리드 시 인구의 두 배나가 되는 숫자입니다. 무덤마다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모든 비석에는 십자가를 표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용서”를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병을 고쳐주기도, 마음에 평안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죄 사함, 즉 용서”입니다. 죄 사함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강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39절)한편 강도는 용서를 거절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용서는 일방적이 아닌 양자 간에 성립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형사소송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간에 무고가 성립되려면 “상호간 합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1829년 미국에서 윌슨과 포스터, 두 사람은 우편물 강도 사건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잭슨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았지만, 두 사람은 사면을 거절하자 원안대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대법원은 “사면의 법적인 효력은 먼저 본인의 수락이 전제되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저와 여러분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용서해 주신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과 성경 여러 곳에서 “회개하라”고 강조하라고 했습니다. 회개를 통해 용서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껏 다른 사람에게 “용서해 주세요!”, “용서했습니다.”란 말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골3:13)“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나의 의지로 용서하기 힘들지만,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실을 기억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가 없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교훈하신 말씀같이 내가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사실을 확신하는 동시에 이웃에 대한 용서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 십자가는 구원의 표시입니다.
흔히 사람들은“2천 년 전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과 나와 무슨 상관인가?”고 말하기도 합니다. (갈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예수님의 ᅟᅵᆺㅂ자가에 우리도 함께 못 박혔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대속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한쪽 편 강도가 (42절)“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고 했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43절)“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은 강도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표식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4복음서를 합치면 모두 89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89장 중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관한 기록이 전체 1/4 보다 많은 25장이나 됩니다. 구약 선지자들을 비롯. 신약의 시도들, 그리고 예수님까지 설교의 핵심 주제는 십자가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고전15:1-3)“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여기에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이보다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기쁜 소식,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처음 두려워 예수 믿는 것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한편 강도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백부장이 예수님을 향하여 “이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백을 목격한 후 확신을 갖고 예수님을 자신의 무덤에 장사하였습니다.
찬송가 439장 “십자가로 가까이” 작사자 크로스 비 여사는 18개월 만에 소경이 되었고, 결혼 후, 아이까지 잃었지만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십자가를 통해 확신과 소망을 가졌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 확신을 가질 수 있길 소망합니다.
- 십자가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세상에서 “사랑” 만큼 많이 통용되는 것도 없지만, 대부분의 사랑은 “조건부적인 사랑”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해주면 나도 너를 사랑할 수 있다.” 또는 “때문에 사랑”입니다. “당신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직장이 있기 때문에 사랑 한다.” 상황이 바뀌면 사랑도 끝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지만, 실망감과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자식 키워 아무 소용없다.”라고 말합니다. 남녀 사이에 “언제는 죽을 듯 사랑한다 해 놓고 이제와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달면 삼키고 쓰면 내 뱉는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사랑의 공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4:7)“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요일서4: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나에겐 사랑의 실체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우리에게 없다.”입니다.
어디에 사랑이 있다고 하였습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여기가 어디 입니까? “화목 제물”이란 십자가를 말합니다. 사랑이 출발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강이 수원지에서 시작되듯,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터리를 계속 충전해야 사용할 수 있듯, 내가 누군가를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도 계속 충전 받아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받아야 줄 수 있고 받은 것만큼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고통과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기 위한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으며,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신 초고의 사랑의 증표입니다.
(고전1: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를 붙잡고, 능력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