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요나

: 요나 4 : 1 – 8

제목 : 내 안에 있는 요나

2023.10.15

요나에게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도망자”입니다. 요나 자신도 (2절)“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나오니”라고, 스스럼없이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나의 모습이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은 “내 안에 있는 요나”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내 안에 도망치려는 요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셨지만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을 쳤습니다. (1:3),(2절)“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학자들은 요나가 도망가려 했던 “다시스”는 오늘의 스페인 세비아 주 “타르테소스”라 주장하며, 예루살렘에서 3,200Km 떨어진 곳입니다.

1장에서 요나가 도망간 경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탔고, 배 아래로 내려갔고, 배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물고기 배속으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갔다는 말은 지리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을 피해 달아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정신 분석학에서 “므두셀라 증후군”이란 것이 있는데, 구약성경에서 969세로, 가장 오랜 살았던 므두셀라를 뜻하는 것으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도피하려는 태도”을 말합니다. 결혼한 부부가 말다툼을 하여, 부인은 친정집으로, 남편은 친구 집으로 가버리는 것과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비유가 주는 교훈 중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자기만족을 위해 아버지를 떠났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고통과 궁핍뿐이었습니다.

학생이 학교가 싫다고 학교를 떠날 수 없으며, 직장인이 직장이 싫다고 직장을 떠날 수 없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렵다고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삶은 “도피하고 도망치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부로 고백록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참회했던 어거스틴은 바울 이후 2000년 기독교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입니다. 그는 30여 년 동안, 하나님을 떠나 방탕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후,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오기까지 방황자일 뿐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내 안에는 도망치려는 요나가 없습니까? 요나가 도망쳤을 때 “큰 폭풍”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요15:5)“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어떤 경우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1. 내 안에 증오심을 가진 요나가 있습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요나의 태도”입니다. 철없는 어린 아이들조차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다음에는 더 잘 하겠다.”라고 용서를 구하거나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요나에겐 이러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화를 내며, 죽겠다고 떼를 씁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 이스라엘을 침공한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요나는 자기 나라를 침공하여 백성을 사로잡고, 재산을 약탈해간 니느웨가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보다 멸망당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들을 용서해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요나는(3절)“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는 “하나님이 어찌하여! 나와 우리 민족의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십니까?” 차마 이 꼴을 보느니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원수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큰 고질병 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 (롬3:29)“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요나는 이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보여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이방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죄인도 회개하면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용납해 주신 자들에 대해 미움과 증오심을 버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삭개오와 남편 다섯을 둔 여인과 강도를 용서하고, 자녀로 삼아 주셨는데, 오늘 우리는

나를 궁지에 몰아넣은 사람, 해를 끼친 사람, 부도덕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받아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용납해 주신 것같이 우리 또한 이웃을 용서하고 용납하므로, 미움과 증오심을 극복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1. 내 안에 관망하는 요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 내가 죽음 가운데서 살아났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살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간음과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용서받은 후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았으며, 베드로 또한 주님을 부인하였지만, 이후 초대교회의 신실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셨음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3:2)“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 성으로 3일을 가라 했지만, 하루만 갔고, 니느웨 백성들에게 단 한마디 “40일이 지니면 무너지리라”라고 전했을 뿐입니다.

이뿐 아니라, (4:5)성읍에 올라가 초막을 지고, 성이 어떻게 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이 멸망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 초막까지 지어 놓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죽는 모습을 구경하려 했습니다.

우리 또한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 외면하고 모르는 채 방관하기도 합니다. (롬12: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했습니다. 길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좀 바쁘더라도 서로 인사하고 반가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이웃이 잘되고, 성공한 것에 대해 박수 쳐줄 수 있어야 하며, 이웃의 아픔에 대해 함께 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타인이 즐거워 할 때 함께 즐거워하지 못하고, 타인이 울 때 함께 울 줄 모르면 내 믿음이 식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성도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관망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마드리드 사랑의교회는 두 번째 담임목사님의 청빙을 앞두고 있습니다. 청빙위원들과 집사님과 권사님, 목사님이 알아야 잘 하시겠지? 관망만 하지 말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야 합니다.

여러분! 내 안에 도망치는 요나, 내 안에 증오심을 가진 요나, 내 안에 관망하는 요나를 버리고,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