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메시지[475]
- 4.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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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의 양극화▉
▉고려시대 분배▉‘고려사 973년, 광종 24년 12월’의 기록에는 “진전(陳田, 밭)을 개간한 사람이, 첫 해의 수확물은 전부를 갖고, 그 다음 해부터는 토지의 주인과 절반씩 나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111년, 예종 6년 8월의 기록에는 “3년 이상 된 밭을 개간했을 경우에는 소작농이 2년간 그 수확물을 소유하고, 제 3년부터는 땅주인과 소작인이 절반씩 나눈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시대 분배▉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직후부터 과전법이라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이른바 “병작반수”, 지주와 소작인이 절반씩 나누는 소작제도로, 조선시대 초기부터 말기까지 500년가량 시행되었다. 한국사 통론 186p에 “과거 귀족이나 양반들이 노비를 부려 농사를 소작을 했을 때는 수확량의 1/2을 받았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소작 제도는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루살렘함락과 분배▉황제 레오 3세(717-741)때까지, 유대를 비롯, 예루살렘에서 지주와 소작인의 배분율은 거의 착취에 해당하는 80대 20이었다. 이런 모순을 틈타 무슬림은 레위기 25장23절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란 말씀을 인용하여, 착취당한 아랍 소작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농민혁명을 일으켰다. 결국 638년 예루살렘은 무슬림과 아랍인들에 의해 점령되고 말았다.
▉프랑스혁명과 분배▉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요인들 가운데, 토지와 소유의 분배에 대한 심한 불균형이 큰 몫을 차지했다. 당시 프랑스 인구의 약 2%에 해당하는 제 1,2 신분인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전체 토지의 40% 이상 소유하였고, 절대 다수인 98%의 평민들이 나머지 60%를 소유하고 있었다. 유명화가 밀레는 당시 치열했던 삶의 현장을 “이삭 줍는 여인”을 통해 잘 표현한 셈이다.
▉요셉의 수확과 분배▉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은 지주와 소작인에 대한 분배 비율을 20대 80으로 정했다. 이러한 분배방식에 대해 지주를 대표한 왕과 백성 모두는 크게 만족했다. 랍비, 삼손 라파엘 허쉬는 요셉이 바로와 백성들의 몫을 20대 80으로 배분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요셉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노예로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토지는 다 내(여호와 하나님)것임이니라.”(레25:23)
◆유럽문화역사이야기(118)“나무도 정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