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열왕기상 19 : 1- 5
제목 : 악의 틀 가운데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
- 3.19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생활하는 것을 제외하고 비 그리스도인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관이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은 “악의 틀 가운데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란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 악의 틀 가운데 갇힌 엘리야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암흑기인 아합 왕과 이세벨 시대에 살았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대신, 바알을 섬기게 하였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보이는 대로 칼로 죽였으며, 엘리야까지 죽이려 찾아 났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친 다음 (4절)“한 로뎀나무 아래 않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엘리야는 17,18장에서 3년 6개월 가뭄 가운데서 기도함으로
비를 내리게도 하였으며, 불로 응답받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세벨의 수하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칼로 죽이기까지 하였지만, 이같은 용맹과 용기는 어디가고 “나를 죽여주십시오!”라고 패잔병과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엘리야는 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까? 무엇이 엘리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낙심하게 만들었습니까?
(3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이 형편을 보고” “현상적인 모습, 육신의 눈으로 보고”란 뜻으로, 엘리야는 지금까지 함께 한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이세벨의 칼만 보고, 크게 낙심하고 두려워 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본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 단 한 번이라도 “평안하다, 최상이다.”라고 생각된 때는 없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언제나 힘겨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과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악의 상징인 바로의 왕궁에 거하며, 총리로 일했으며, 모세 또한 바로의 왕궁에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벨사살 왕의 신하로, 다리오 왕 아래서 총리를 했으며,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의 아래서 장관직을 지혜롭게 잘 수행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환경이나 악의 틀이 악하다는 이유로 그곳을 떠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의 맛과 향기를 내었습니다. 주님이“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하신 것같이, 우리가 머문 곳에서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 악의 틀 가운데 사명을 감당한 오바댜
21장에서 왕비, 이세벨의 악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신실한 나봇이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 선동한 후에 돌로 쳐 죽이고,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거하는 왕궁의 모든 살림을 책임 맡은 신하, 오바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8:3)“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12)“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요즘 말로 하면, 오바댜는 모태신앙으로, 조기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반 조기교육이 중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조기 신앙교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란 뜻을 가진 오바댜는 그의 이름과 같이, 악의 틀 속에서 방부제 역할을 했으며,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큰 별이었습니다. 오바댜는 엘리야와 달리 악의 틀 속에서 조용하고 지혜롭게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18:4, 13)“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주군인 아합과 이세벨이 선지자를 죽이고 있을 때에 오바댜는 선지자를 살리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곳이 타락된 길로 치닫고 있을 때에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바댜를 통해 내가 머문 곳에서 조용히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바다소금의 농도는 약 2.7-3% 정도 된다고 합니다. 3% 정도 되는 소금이 지구의 오염을 방지하고, 모든 생명체를 살리고 보존합니다. 미국 버클리 로버트 벨리교수는 “어느 국가든지 그 국민의 2% 정도만 있으면, 새로운 비전을 가질 수 있다.”라고 한 말은 옳은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머물고, 처한 환경이 믿음의 생활하기 좋은 환경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수시로 부정과 불신앙을 강요하며, 비양심적인 방법을 제시해 올지라도, 흔들림 없이 오바댜와처럼,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감당하도록 힘쓰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 악의 틀 가운데 남겨둔 7천명
1592년, 일본군이 200여척의 배를 이끌고,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에, 왕과 신하, 온 백성들이 두려워 도망할 때 이순신장군은 “왕이여! 신에게 아직 13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실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단 13척으로, 일본의 수군을 대파함으로써 승리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이 선지자들을 처참히 죽일 때, 자기 외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고 크게 낙심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10절)“오직 나만 남았나이다.”고 속단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18절)“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엘리야처럼 “나 혼자만 남았습니다.”라고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롬11:5)“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하나님은 시대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하였습니다.
나 혼자, 우리만 진리를 지키고, 교회를 사랑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은 편협한 생각입니다. 지금도 교회의 부흥을 위해 밤을 새우며, 새벽마다 기도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시대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남겨두셨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구에서 “구원투수”가 있는데, 감독이 최고투수를 아껴 두었다가 팀이 위기 때 내 보내는 투수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멸할 때 노아와 8식구를 남겨두었으며, 하나님은 믿음의 대를 잇기 위해 이삭을 남겨 두었으며, 주님승천 후, 120명을 남겨 신약교회를 모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그곳이 직장과 사업 터, 학교와 가정이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머물고 있는 그곳이 아무리 악하고, 힘들다 해도 그곳에서 소금의 역할 감당하도록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곳, 내가 처한 곳에서 엘리야와 오바댜, 남겨둔 7천명과 같이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명,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