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성도와의)관계에서 최우선되는 3가지

성경 : 빌레몬서 1 : 8-14

제목 : 대인(성도와의)관계에서 최우선되는 3가지

  1. 1.29

빌레몬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불과 334 단어, 25절로 구성된 짧은 서신이지만 “대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서신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대인(성도와의)관계에서 최우선 되는 3가지”란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서열(수직)보다 우선되는 것은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한국 최초의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후배 선교사들에게 “여러분이 한국인의 방에 들어갈 때는 말석에 앉아야 합니다.”라고 하자 후배 선교사들이 “그럼 상석과 말석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묻자 “방안에 갓이 걸린 곳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 상석이며, 그 반대편이 말석”입니다.

한국인은 대체로 인간관계를 서열적으로 파악하는데 익숙한 편입니다. 처음 사람을 만났을 때에 가장 먼저 신분과 직함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가 사장인지? 상무인가? 부장인지? 대리인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태도와 대화의 내용이 달라져야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대가 선배인가? 후배인가?” 모르고 있다가 자신이 선배이면, 금세 말을 놓으며, 자신이 후배이면, 곧바로 형님, 언니라 부릅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가장 먼저 명암부터 주고받습니다. 명암을 통해 상대방의 신분이나 직위를 알므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와 대조적입니다. (1절)“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은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야” 바울은 디모데를 형제, 빌레몬을 동역자, 그의 부인을 자매, 그의 아들을 함께 병사 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명칭은 수평적인 관계가 특징입니다.

로마교는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 부제 등은 계급이지만, 개신교회 목사, 장로 집사, 권사의 직분은 계급이나, 서열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동일한 성도이며, 동역자, 형제, 자매입니다.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라 했습니다.

한국이 2002년 월드컵 4강 기적을 이룬 히딩크감독이 제일 먼저 깨뜨린 것이서열입니다. “지성이 형님 공 주세요!”라고 패스하면, 상대편이 먼저 공을 가로채 갑니다. 그러자 히딩크는 “형님”이란 존칭을 빼고 “지성” 이름만 부르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수비와 공격이 더 강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집에서 “내가 사장이야!”하는 사람이 없듯, 교회에서 성도와의 관계에서 또한 서열과 계급의 관계가 아니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와 성도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동역자이기에 서로 세워주고, 존경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1. 명령보다 강한 것은 자율적인 관계입니다.

바울이 동역자라 부른 “빌레몬”은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때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의 집에서 골로새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종을 소유할 만큼 부유했으며, 오네시모란 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고, 로마로 도망을 쳤습니다.

하지만, 오네시모는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다시 골로새로 돌아가라고 권면했고, 반면에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를 돌려보낼 터이니,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맞이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한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8절)“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바울이 명령하지 않고 사랑으로 간구했습니까? 그것은 명령보다 사랑의 힘이 더 크고 강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4절)“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또한 자율적인 것이 억지보다 힘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공식 하나를 만들어 봤습니다. “명령보다 사랑이, 억지보다 자율성이 강하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7년 동안 일할 때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창29:20)“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사랑의 수고는 7년을 수일 같이 여길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학생 여러분! 부모가 공부해라시켜야 공부합니까? 회사나 상급자가 “열심히 일해라” 시키기 때문에 일합니까? 부모나, 아내, 남편 눈치 때문에 교회 나옵니까? 누구 때문에 교회 출석하고, 봉사하고, 억지로 인사하고, 억지로 웃습니까? 억지로 하는 것보다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부모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감동적인 것은 사랑과 자율적인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벧전 5:2)“억지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과 자원된 마음으로 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1. 정죄보다 효과적인 것이 용서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고 도망친 오네시모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10절)“내가 낳은 아들” (11절)“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유익하다”, (12절)“그는 내 심복”이라 불렀습니다.

대인관계에서 언어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가 도둑질해서 로마로 도망 쳤다.”고 않고 (15절)“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정죄가 아닌 용서하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용서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이미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 용서를 구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네시모 자신이 빌레몬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두기고와 함께 골로새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12절)“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골4:9)

동네 아이들이 종종 싸웁니다. 얼굴이 찢어진 아이의 엄마가 “누가 그랬어?”하면, 철없는 아이는 도망칩니다. 그러나 철이든 아이는 본인이 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것을“결자해지”라 합니다. 문제를 풀어야 할 사람은 뒤에 숨어있고, 제 3자가 문제를 풀려하니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맥아더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에서 “용서를 구하는 아들이 되게 하옵시며, 또한 용서할 줄 아는 아들을 주옵소서!” 여러분!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비록 자신이 잘못이 없거나, 적다고 해도,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해 기꺼이 용서를 구하고, 책임지겠다는 마음입니다.

성도와의 관계는 서열보다 우선되는 것은 수평적인 관계이며, 성도와의 관계에서 명령보다 강한 것은 사랑과 자율적인 관계이며, 성도와의 관계에서 정죄보다 효과적인 것은 용서입니다. 동역자의 마음, 사랑과 자원된 마음, 그리고 서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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