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명절에 무엇을 하셨는가?

성경 : 요한복음 5 : 1- 6

제목 : 예수님은 명절에 무엇을 하셨는가?

  1. 9.11

추석 잘 보냈습니까? 한가위로 불리는 추석은 설과 함께 우리 대표적 명절입니다. 유대인들도 명절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명절에 무엇을 하셨는가? 5-7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명절을 무엇을 하셨는가?” 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은 명절에 병든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명절은 도시에서 시골로 갑니다. 이번 추석에는 인구의 약 3/5에 해당하는 3천 만 명 이상이 이동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명절에 시골에서 수도로 갔습니다. 그것은 명절에 성전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명절에 성전이 아닌,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3절)“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주님께서 성전이 아닌,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셨는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많은 병자들 중 38년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었습니다. “예” 하면 되는데, (7절)“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내려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38년 병자는 지금껏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란 피해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38년 된 병자가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다.라고 한 말입니다. AD 37년경 살았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보통 명절에 모인 군중은 200만 명이 넘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란 “자비의 집”이란 뜻인데, “자비의 집에 자비”가 전혀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고통 자체보다 그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입니다. 38년 병보다 더 큰 불행은 “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명절에 그 많은 사람들 중 단 한 사람, 가장 소외된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고,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아플 때 병원에 함께 갈사람, 슬플 때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있습니까? 대화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 함께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다는 이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알아야 합니다. (롬12: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하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주 슬픔을 만납니다. 누가 상처를 건드리면 눈물샘이 펑 터지는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고통이 많아 슬픈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해주는 사람이 없어 슬픔이 큰 것입니다. 단 사람, 낙심하고 힘든, 단 사람에게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명절이길 소망합니다.

  1. 주님은 명절에 배고픈 자를 먹이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이 왔을 때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5천명이 넘는 군중들이 예수님을 뒤따라 왔습니다. 군중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떡을 얻어먹는 편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종교가 떡보다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인 부활절, 성탄절은 주님을 가까이 하는 절기이기보다 가장 멀리 떠나는 절기로 정착해 가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가 영향력을 잃어 버렸듯이, 오늘날 기독교도 아주 빠른 속도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절기를 지켰는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1: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너희는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나는 이번 명절에 성전에 갔다 왔다.” “나는 유월절에 비싼 송아지 드리고 왔다.” 신앙의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았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반면 주님은 군중들이 배가 고팠지만, 먼저 말씀(눅9:11)을 들려준 후 떡과 생선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6: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니 아니할 터이요” 주님은 육신의 양식을 통해 영적 양식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식사하는 사람을 식구라 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벧전2:2)“순전하고 신령한 젖”, (마4:4)“떡”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영적인 식사하는 관계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서 있는 이곳을 강단 혹은 설교단이라 합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밥상”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의 몸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균형 잡힌 식사를 해야 하듯,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롬10:17)“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여러분! 기독교는 타종교들과 달리 듣는 종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보는 종교로 변해가는 것은 신앙이 형식화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을 듣는 만큼 자라며, 듣지 않는 만큼 퇴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숙하도록 더욱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1. 주님은 명절에 형제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형제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요7:5)“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형제들은 (요7:4)“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말씀과 같이, 오병이어 기적이나,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은 믿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형제들이 육적인 관계와 소속이 믿음이라 생각했을 때 주님은 (마12:46-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믿음의 형제, 자매, 모친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이적과 육신의 소속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종종 모태 신앙이 곧 자신의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태 신앙이 믿음에 유익한 것은 사실이지만, 믿음의 본질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나, 사무엘은 신앙이 좋았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가 과거, 독일에서 교회를 섬길 때, 독일교수와 결혼한 여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예배가 끝난 후 항상 식사시간에 맞추어 교회 왔습니다. 제가 “남편이 예배도 참석하도록 해 보라”하자, 부인은 “제 남편은 성경도 잘 알고, 보통 믿는 사람보다 착하다.”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남을 해롭게 하지 않고, 착한 사람”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외국에서 자주 명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명절이 오고, 가는지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 아쉬움이 있는 명절이지만, 오늘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명절을 보내야 할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비록 우리는 주님과 같이 병자를 고쳐줄 수는 없지만, 병든 자를 찾을 수는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주님과 같이 5천명을 먹일 수는 없지만, 한 두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가족과 친척들을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사랑의 마음을 전할 수는 있습니다.

기쁨과 아픔,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명절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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