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왜 꼭 붙잡아야 하는가?

성경 : 아가서 8 : 6-7

제목 : 사랑, 왜 꼭 붙잡아야 하는가?

  1. 7.24

세상에서 사랑보다 많이 통용되는 말과 주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통용되는 사랑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므로, 능력이 있으니까 나도 사랑한다.” 조건부 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은 “사랑, 왜 꼭 붙잡아야 하는가?”란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랑의 능력,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한 것이 없으며, 죽음을 정복한 사람 또한 없습니다. 어떤 왕과 영웅도 죽음에 항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도 겨우 33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믿음의 조상들마저도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였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으로,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하며,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전15:53)“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롬6:23)“죄의 삯은 사망이요” 죽음은 죄의 결과로 온 것이기에 아픈 것이며, 두려운 것입니다. 창세기 4,5장, 역대상 1-9장, 마태복음 1장에서 “낳고 죽었더라.”란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6절)“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7)“많은 물도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불과 홍수도 사랑을 삼길 수 없다고 했으며, (롬8:38-39)“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서머나교회 폴리갑감독을 비롯, 영국 위클리프,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는 믿음을 지키다가 화형을 당했습니다. 폴리갑은 “나는 화형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하였으며, 얀 후스는“기독교인이여, 진리를 수호하라.”고 외치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여러분! 아직 우리가 비록 죽을 때가 아니라 할지라도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해야합니까?

(요일4:17)“사랑이…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부활하신 주님은 죽음을 직감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사랑”을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죽음 뿐 아니라, 누가 세상을 두려움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비록 현실은 낙망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사랑하신다고 확신할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므로,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1. 사랑의 가치, 무엇과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율법(출21:), 주인은 종을 6년 동안 일을 시킨 후, 7년째 자유를 주어 내보내도록 했습니다. 이 때 종은 아내와 자녀를 두고 혼자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들은 혼자 자유하지 않고 주인의 집에서 아내, 자녀와 함께 평생 종으로 살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에(출21:6)“송곳으로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 “귀를 뚫다”란 “사랑으로 스스로 종이 되다”란 뜻입니다. 즉, “사랑 때문에 귀를 뚫어 종 된 증표를 갖도록 하였습니다. 사랑 때문에 종의 길을 택한 이들, 참으로 위대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녀를 세상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은“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공부를 좀 못해도, 건강이 좋지 않아도, 이웃집 길동이와 바꿀 수 없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질문하겠습니다. 아들딸과, 금덩이 중 어느 것이 소중합니까?

(7절)“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사랑을 돈과 바꾸는 사람, 사랑을 출세와 바꾸는 사람, 사랑을 물질로 계산하려는 사람은 멸시를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보다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전13:13)“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정말 사랑이 제일입니까?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각양 은사의 소중함을 말씀한 후 다음과 교훈하였습니다.

(고전13:3)“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지혜와 지식과 능력, 남을 구제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문자대로 “nothing” “무의미한, 무익한 존재”란 말입니다.

누구나 가장 중요한 순간, 청혼할 때, 결혼할 때, 세상을 떠날 때, 듣고 싶어 하고,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란 말입니다. “사랑한다.”란 말 한 마디면 족합니다. 사랑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종이 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1. 사랑의 실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에 대한 실망감이나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에 대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자식도 소용없다.”라고 말합니다. 남녀들은 “언제는 죽을 듯 사랑한다 해 놓고 이제와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달면 삼키고 쓰면 내 뱉는다.”라는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사람에게는 무한히 사랑하거나 사랑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핸드폰을 충전하여 사용합니다. 혹 방전이 되어 결정적인 순간에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해 낭패를 당하듯, 사랑도 방전이 됨으로 매일 매일 충전해야 합니다.

(요일4:7)“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직설적으로 하면, “너희에게는 사랑이 없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은 받아야만 줄 수 있다.”란 뜻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내가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서 비추듯, 우리는 사랑의 발광체가 아니며,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배터리로 충전 받는 것이 아닙니다. (4:12)“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 왜 이토록 사랑이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수도 없이 “서로 사랑하라.” “피차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모두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가 공식 하나를 만들어 봤습니다. “사랑은 받아야만 줄 수 있고, 사랑은 받은 것만큼 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죽음을 이기고, 오늘의 현실 또한 담대히 맞이할 수 있습니다.
  2. 사랑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사랑 없는 인생은 무가치 할 뿐입니다.
  3. 우리에겐 사랑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아, 서로 많이많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