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나귀

성경 : 마태복음 21: 1-5

제목 : 예수님과 나귀 [2022. 4. 3]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돈 키호테의 시종, 산초가 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4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5째 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과 나귀”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나귀는 주인을 압니다.

성경은 동물을 통해서 많은 교훈들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공중 나는 새를 보라.”“독사의 자식들아”, 지혜자는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이사야는 (사1:2-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안다.”라는 것은 부부관계를 말하며, “부부가 서로를 아는 만큼 안다.”란 뜻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동물이라도 사람을 동물과 비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특히 이사야가 소와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은 주인을 모른다고 한 말씀은 치명적입니다. 이사야는 소와 나귀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출생하였을 때에 요한은(요1:10-11)“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라고 했으며, 본문에도 백성들이 예수님을 향해 “이스라엘 왕이시여” 큰 소리로 외쳤지만 (11절)“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오직 한 사람은 주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1-2절)주님이 두 제자에게 마을에 매여 있는 나귀를 풀어올 때,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귀를 소유한 사람은 나귀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물었습니다. 제자들은“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답하자, 주님은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도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애에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로마시대는 가이사가 주인이었습니다. 지금은 돈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소와 나귀도 주인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인생에 주인을 아는 것만큼 큰 복이 없습니다. “나의 주인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은 나귀를 탔습니다.

5절은 구약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으로, 마태가 인용하였습니다.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스가랴는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에 대하여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겸손하여란 교만의 반대 겸손의 의미와 함께 볼품없는”“비천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오래전부터 나귀는 비천한 짐승으로 이해되어, 짐이나 싣고 수레를 끌거나, 지체 높은 사람이나 왕이나 장군이 타는 짐승이 아닙니다. 역사에서 왕이 나귀를 탔다는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마드리드 솔 광장에는 카를로스 3세의 기마상이 있으며, 마요르 광장에는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이 있습니다. 유럽의 중심도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청동 기마상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고대사회는 왕과 장군들은 말을 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나귀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비천함과 낮아지신”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음에도 죄인들을 속량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시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두 가지 기념비적인 일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과 성만찬 예식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은 친히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이요, 성만찬 예식은 십자가를 통해 희생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셨고, 비천해 지셨습니까? (고후8:9)“부요하신 이로써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여 하심이라.” 주님은 Superstar 로 오신 것이 아니며, 저와 여러분의 부요를 위해 머리 둘 곳조차 없었으며, 낮아지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권세를 부리고 힘을 과시하는 종교가 아니며, 군림하고, 약자를 무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겸손하고 섬기는 자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1. 예수님은 나귀처럼 우리의 짐을 대신 졌습니다.

이솝우화에말과 나귀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귀와 말에게 짐을 지우고 길을 가는데, 나귀는 말에게 내가 너무 힘들어 짐을 조금만 져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말은 냉정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얼마 후 나귀는 중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말 위에 나귀가 진 모든 짐과, 죽은 나귀까지 지고 가게 했습니다. 말은 “이게 무슨 고생이냐! 작은 짐을 지지 않으려다가 결국 나귀의 짐과 나귀까지 짊어지게 되다니.” 나귀를 돕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대에서 나귀는 낙타는 가장 대표적인 교통수단으로, 주인을 위해 척박한 환경에서 고통을 감수하며 무거운 짐을 마다않고 지는 유용한 동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생각할 때 (사53: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가 져야 하는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크게 3가지 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져야 하는 짐입니다. (갈6:5)“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니라” “혼자 질수 있는 가벼운 짐”입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긴 짐이 있습니다.

(6:2)“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여기 짐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서로”짐을 지라고 하였습니다. 서로 짐을 지기 위해 상대가 지고 있는 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내, 남편, 자녀, 직원들의 짐이 무엇인지 알아야 서로 나눠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맡겨야 할 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많은 짐 가운데, 해결할 수 없는 짐이 있습니다. 죄의 짐입니다. (마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죄의 짐을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나귀는 주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나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의 주인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습니까? 주님은 나귀를 통해 우리가 섬기며, 겸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과 특히, 죄의 짐을 주께 맡김으로 평안과 쉼을 얻을 수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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