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 홍해, 백해

흑해, 홍해, 백해

 

사람들은 보통 바다를 푸르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바다는 반드시 푸르지만은 않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 있는 황해(Yellow Sea), 러시아의 백해(White Sea), 지중해와 연결된 흑해(Black Sea), 그리고 수에즈운하와 연결된 홍해(Red Sea)는 색깔이 각기 다르다.

 

흑해, NATO와 러시아가 힘겨루기 하다.

영어로 흑해를 “Black Sea”라고 하는데, 이름과 같이 흑해는 염도가 낮고 바다 밑의 황화수소로 인해 물의 색깔이 다른 바다에 비해 검게 보인다. 15세기 오스만제국이 이곳을 지배한 후 최초로 흑해라고 불렀다. 이는 러시아 카라해(Kara Sea)와는 전혀 다른 바다이다. 그런데 터키어에서 “kara”는 “검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검은색은 “북쪽”을 상징하기도 한다. 터키인들은 터키 서쪽에 있는 지중해를 “흰 바다”(Akdeniz)라고 부른다. 여기 흰색(ak)은 색깔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쪽을 가리킨다. 옛 터키인들은 보통 북쪽을 흑색, 적색은 남쪽, 동쪽은 청색, 그리고 서쪽을 표시할 때 흰색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지중해와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사이에 둔 흑해는 대략 18세기 말까지 오스만제국 터키의 내해였다. 그러나 2014년 러시아는 옛 소련의 향수 때문인지 흑해로 진출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흑해의 요충지인 크림반도와 합병을 했다. 러시아는 흑해를 장악하는 것이 곧 크림 반도를 접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었다. 사실 역사적으로 흑해의 요충지 크림반도는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몽골제국(킵차크한국)이 지배하다 1400년대 중반 오스만튀르크가 지배했다. 1783년부터 1954년까지는 러시아 제국이 크림반도를 지배해오다 1954년 소련의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양도하므로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다. 이런 이유로 항상 러시아는 지중해 진출을 꿈꾸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흑해를 영향권 아래에 두고 싶어 했다.

 

이런 가운데 2014년 3월11일, 크림 자치공화국은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후 96.6%라는 압도적인 주민투표의 찬성으로 러시아와 합병을 추진하게 되었다. 크림반도와 합병한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흑해의 요충지인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항에 호위함과 잠수함 등을 정박시킬 수 있게 됐다. 미국과 나토 또한 러시아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군사력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과거 흑해의 주인노릇을 했던 터키와 흑해 전체 길이 37.5%를 차지하면서도 주도권을 빼앗긴 우크라이나는 군사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있다. 유럽, 나토와 러시아는 흑해를 둘러싸고 갈수록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홍해,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다.

 

성경에서 홍해(Red Sea)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건넌 바다를 말한다. 홍해는 적조현상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바다가 붉게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홍해는 북동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를 갈라놓는 큰 바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가 있는 곳을 말한다. 홍해를 말할 때 수에즈 운하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홍해의 가치는 수에즈 운하에 있기 때문이다. 수에즈 운하는 총연장 길이 192km로, 1869년 11월17일에 개통되었다.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과 대서양 그리고 태평양을 연결하며,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세 대륙을 직통으로 연결해 주고 있다. 운하의 항구는 홍해 쪽이 수에즈이며, 지중해 쪽은 포트 사이드이다. 수에즈운하는 한마디로 유럽 국가들에게 부를 창출해 주는 무역로이자 젖줄과도 같다. 운하가 개통되기 전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려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가는 길밖에 없었다.

런던에서 싱가포르까지 기존항로는 약2만4500㎞ 정도였는데, 운하가 개통됨으로 항로는 1만 5027㎞, 약 1만㎞(약 40%)정도가 단축되었다. 폼페이까지는 51% 정도 단축되었다. 현재 세계 해상 무역량의 8%가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이동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런 경제성과 편리함은 국가 간에 이권다툼으로 비화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홍해를 중간에 두고 있는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주변 나라들과의 분쟁 또한 끝일 날이 없었다. 대략 1956년부터 계산해도 전쟁과 내분으로 운하가 폐쇄된 것이 다섯 차례나 된다. 운하가 폐쇄 될 때마다 유럽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고, 전 세계 또한 경제적 손실과 이로 인한 혼란은 가공할 정도로 심각했다. 특히 제 3차 중동전쟁이 터진 1967년부터 8년 동안의 운하 폐쇄로 인한 경제적인 손실은 상상을 초월했다.

 

많은 학자들은 지금껏 인류가 건설한 토목공사 가운데 수에즈운하만큼 세계의 경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진 것이 없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으고 있다. 과학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쥘 베른”(1828-1905)이 쓴 “80일간의 세계 일주”(1873)에서 수에즈 운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80일 세계 일주에서 일정을 가장 많이 단축시켜 준 것이 바로 수에즈 운하였다. 이렇듯 수에즈 운하는 세계시장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수에즈 운하는 교통의 대혁명을 가져다준 대표적 혁신이었다.” 모세가 출애굽 후에 백성들과 함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동할 때, 어린아기 예수께서 잠시 이집트로 피신하여 다시 돌아올 때도 이 길을 통과했었다.

 

백해, 발트 3국을 삼키다.

 

러시아의 북쪽에 백해(White Sea)가 있다. 백해는 러시아의 콜라 반도와 카닌 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로 면적은 약 300㎢에 달한다. 빙하 때문에 바다가 희게 보인다. 1년 중 2/3, 약 200일 정도가 얼음에 덮여 있다. 백해는 러시아의 중요한 해상무역로이지만, 그보다 군사기지로서의 목적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스탈린은 1931년부터 1933년, 3년 동안 백해와 발트 해를 잇는 총길이 227km 운하(러시아어-벨로모르 카날)를 건설했다. 운하건설로 러시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아르항겔스크까지 수로를 약 4,000㎞ 단축함으로 군사요충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운하는 불행하게도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수많은 죄수들의 생명을 희생 시켜 건설하므로, 말 그대로 인골(人骨)위에 세워진 백해 운하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유럽에서는 “위대한 공학적 업적”, “인간 갱생의 승리”라고 찬양했다. 프랑스 드골 정권에서 문화부장관을 지낸 작가 앙드레 말로 역시 끔찍한 인명 희생에는 침묵한 채 운하건설을 칭찬했다.

 

러시아의 주력함대는 발틱함대, 북방함대, 흑해함대, 그리고 태평양 함대로, 이중 1933년 창설된 북방함대가 가장 막강하다. 북방함대는 1933년 개통된 백해운하의 개통과 함께 창설되었다. 백해운하가 개통됨에 따라 소련의 함대는 발틱 해와 스칸디나비아 해상 로를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소련은 구축함과 잠수함 등을 배치함으로 영국을 비롯한 독일, 발틱 3국 모두에게 잠재적 위협을 넘어 공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1937년부터 긴장이 고조되면서 드디어

1939년11월30일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발발한 전쟁으로 제1차 소련, 핀란드의 겨울전쟁 이라고도 한다. 핀란드는 1년 넘게 버티었지만 결국 항복하여 소련에게 카리알라(핀란드 영토의 10%, 산업능력의 20%에 해당)를 넘겨주고 겨우 소련에 흡수되는 불행을 면했다. 소련은 또한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채결한 후 곧바로 1940년 6월15일 라트비아를 침략했고, 6월16일에는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를 침략했다. 소련은 거의 일주일 만에 발트 3국을 점령했고, 각국의 군대는 무장해제 당했다. 하지만 1941년 6월22일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련이 닦아 놓은 백해 발트운하가 있는 소련의 북쪽은 물론 세 방향으로 침공했다. 결국 백해와 발트운하는 아군과 적군이 함께 사용했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