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믿음은 안전한가?

성경 : 누가복음 22 : 54 – 62 / 제목 : 나의 믿음은 안전한가?

  1. 8.16

요즘 코로나로 “2m 거리두기”는 익숙합니다. “에드워드 홀”은 “4유형의 거리두기”를 말했습니다.

가장 친밀한 거리는 46cm, 개인의 안전거리는 46-122cm, 사회적인 거리는 1.2m-3.7m, 공적거리는 3.7m로 분류했습니다. 오늘은 “나의 믿음은 안전한가?”란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나와 주님과의 거리는 안전한가?

베드로는 불타는 열정과 열심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그냥 뛰어내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급한 마음에 수영도 못하면서 대책도 없이 바다에 뛰어내리는 열정이 있었지만 믿음에서 떨어졌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54절)“베드로가 멀찍이 따라 가니라” “멀찍이”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거리, 즉 상황이 유리할 때 따를 수 있지만, 불리할 때는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합니다. 야고보는 “두 마음”이라 했고, 오늘날 젊은이들의 말로하면 “양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 사이가 좋다.”라고 말할 때 서로 빈틈이 없이 딱 붙어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이”는 “거리”(間)란 말로, “형제들이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다.”는 뜻으로, 서로 우애하며 잘 지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촌수를 말할 때에 나와 가장 가까운 촌수는 누구입니다. 형제, 자매는 이촌입니다. 부모 자녀는 1촌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무촌이라 합니다. 1촌(한 치)의 거리는, 손 한마디란 뜻으로, 3.03cm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나와 어떤 관계입니까?

 

(4절)“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무촌으로, 거리가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지난주 집 정리를 하면서 인터넷 케이블 1/3정도를 망가트렸는데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수도관이나 전기는 1 Cm만 떨어져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우리가 멀찍이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나와 주님과 거리는 안전한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과 멀어진 거리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 위험의 자리입니다. 요나가 그러했고, 탕자가 그러했습니다. 낙오된 동물이 먹이의 표적이 되듯이 주님과 떨어질 때 마귀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줄을 단단히 붙잡고, 주님에게서 떨어지지 않길 소망합니다.

 

  1. 나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시1:1)“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인은 사람이 악에 빠지는 단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 악인을 따르는 단계며, 다음은 죄인의 길에 서게 되는 단계, 그리고 죄인의 자리에 주저앉아 됩니다.

 

영어 성경에는 (Walking), (Standing), (Sitting)라고 했는데,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 베드로는 주님을 재판하는 사람들의 뒤를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다음, 죄인들과 함께 했으며,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발걸음은 사람의 행동과 나아가 삶의 방향과 목표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어디론가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잃어 버린 사람,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요즘 거리를 지나다 보면 TV, 컴퓨터 등 가전제품들이 버려져 있습니다. 꽤 비싸게 주고 산 것들인데 왜 버립니까? 목적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구입한 물건이 언제 가장 좋습니까? 내가 사용하고자 하는 그 목적에 따라 사용할 수 있을 때 “좋다.”라고 말합니다.

 

(롬14:7-8)“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우리의 존재 가치는 주를 위해 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닷가에서 산책을 하다가 뒤를 돌아 발자국을 보면 구불구불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바르게 걷는 것도 힘들 듯, 바른 목표를 따라 행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119:105)“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갈 때 비로소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바른 길을 가길 소망합니다.

 

  1. 나에게 공주병, 왕자병은 없는가?

한 때 공주병과 왕자병이란 말이 유행된 적이 있습니다. 정신과에선 “자기애적 성격장애”라 부릅니다. 자기는 보통 사람이 아니며, 최고라고 생각하며,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거만한 태도로 타인을 무시하는 사람을 공주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현대 의학도 공주병과 왕자병을 병자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갈6:3)“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자신의 부족을 모르는 사람”,“자신을 과대하게 생각하는 자”를 성경은 “교만한 자”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도 한 때 왕자병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했을 때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겠나이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자신은 다른 제자들과 다르며, 다른 제자들을 싸잡아 무시했습니다.

 

공주병, 왕자병을 진단하는 세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 “휘브리스” “자만”입니다.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고 남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둘째, “아테”(Ate)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은 옳으며, 선하다.”라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셋째, “휴페레파노스” “교만”으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최고의 장면을 “압권”이라 하는데 조선시대 장원급제한 시험지를 “압권”이라 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의 시험지를 누르고 가장 위에 있는 시험지를 압권이라 합니다. 교만이란 다른 사람을 누르고 자신을 올려놓는 것을 말합니다.(잠16:)

 

선인장의 가시는 처음 잎사귀였지만 땅이 메말라 가시가 된 것입니다. 믿음도 이와 비슷합니다. 영적으로 메마르면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 사람들을 공격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거리와 방향을 점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침노 당하지 않고 성숙하게 자라갈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