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누가복음 11 : 37-44
제목 :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인
- 2. 2
유대사회에서 “바리새인과 같다.”라고 하면 “이중인격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에 대한 태도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이름입니다. 그것은 위선자의 대명사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다섯 차례나 “바리새인이여!”라며 책망하셨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인”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말과 행동이 다른 바리새인이 있다.
바리새인이란 이름은 “구별된 자”란 뜻으로, 좋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구별되게 사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왜 바리새인들을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까? 그것은 말과 행동, 겉과 속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에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이라 적고 있습니다. 즉,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담배를 끊도록 훈련하는 금연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중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는 담배를 끊기로 했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느끼게 하여 자신의 결심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정반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금식도 하며 구제를 했다.”라고 자랑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허물과 수치를 숨기거나 만회하기 위해 금식이나 구제한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거나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39절)“너희 바리새인들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이중적입니다. 거기에다 현대 사회 구조가 우리를 이중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만 가정에서는 나쁜 아버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타인들에게는 친절하고, 잘 하지만, 아내에게는 낙제인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1위가 40일 금식기도 한 성도, 2위는 철야기도 많이 한 권사님, 3위가 신학을 공부한 장로님이라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은혜와 달란트를 잘못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중성을 극복하려면 다른 사람이 과도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중적이 되는 이유는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은 죄인이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죄인 중 괴수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추한 모습을 알고 깨달음으로써 헛된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행이 불일치한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공동묘지에 가보세요! 주변 경관이 아주 빼어나고 쾌적합니다. 그런데, 무덤 안에는 섞어서 냄새나는 시체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말과 행동 속과 겉이 다를 때, 결과적으로 악취를 내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잘못을 거룩으로 포장하려는 태도, 자신의 참 모습과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하다 보면 결국 이중적인 사람이 돼버립니다. 우리 속에 바리새인적인 요소들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힘쓰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타인은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 바리새인이 있다.
유대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회당과 탈무드, 그리고 랍비입니다. 회당은 대체로 BC 586년, 이스라엘이 바벨론포로로 잡혀 간 이후 출현했는데, 회당은 예배와 율법연구, 학교와 유대인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데, 모세오경을 근간으로 BC 500년부터 AD 500년까지, 약 1,000년의 유대종교와 역사와 전통 등을 수록한 것으로, 모두 20권정도로 12,000 페이지로, 무게만 약 75Kg 되는 엄청난 분량의 책입니다.
탈무드는 한 마디로 신앙과 도덕, 역사와 전통 등을 망라한 것으로, 유대인들은 지식과 지혜의 바다라 부릅니다. 바다에 모든 것들이 있듯이 탈무드에 자신들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고 믿고 가르치고 배웁니다.
예를 들면, “탈무드”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키소” 이는 “돈지갑”이란 뜻으로,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며, 둘째 “코소”, “향락”을 뜻하는 것으로, 무엇을 즐기는가를 통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카소”, “분노”란 뜻으로,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정하느냐에 따라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랍비는 “선생”이란 뜻으로 율법과 탈무드를 가르치며, 공동체 대표이자 어른이었습니다. 랍비는 신약시대부터 최고의 권위와 존경을 받았으며, 재판에도 참여했으며 모든 자리의 상석에 앉았습니다. 랍비는 종교예식, 결혼주례와 장례식, 개업, 이사 등 크고 작은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법관이나 경찰보다도 랍비의 말 한 마디가 더 큰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랍비가 되고 싶어 합니다. 랍비는 한국식으로 하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기만 하면 출세도 하고 사회적 지위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바리새인은 공동체 어른으로 사람들을 지도하고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행하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 남에게 책임을 지우면서 자신은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나쁜 것은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롬2:21-23)“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하는 네가 간음하느냐”라고 지적하였고, 또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마23:17)“어리석은 맹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옛날 제가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께서 “너희들은 누구누구를 본 받으라.”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본 받으라고 할 만한 지도자나 위인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눈을 닦고 보아도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과거에 비해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줄었기 때문도 있지만, 도덕적인 수준이 향상되었고, 비판적인 눈이 더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과거에는 나라와 가정을 희생하고 가난하고 굶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감격했으나, 요즘 사람들은 “아마 숨겨 놓은 재산이 있겠지?” 더욱 심한 것은 “자신이 굶은 것은 그렇다하더라도 가족조차 굶겨서야 되겠어?” “다 자기 좋아서 한 것이니까?”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기 일쑤입니다.
다윗의 강점은 나단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나단 선지자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나단의 가르침과 책망을 달게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적어도 자신이 행한 잘못과 실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족한 것과 연약함을 위장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숨지지 않을 때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섬기지 않으면서 섬김을 받으려는 바리새인이 있다.
(46절)“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사회적인 배경을 가지고 높은 자리 않기를 좋아했지만,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두 가지 기념비적인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는 성만찬이요, 다른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입니다. 성만찬을 통하여 자기의 십자가의 희생을 보여주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을 통해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마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가 희생과 다른 사람의 짐을 지지 않고는 결코 섬길 수 없습니다.“집사, 권사, 목사”는 “섬기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이 AD 70년 로마에게 멸망한 후 1948년5월14일에 독립했습니다. 2000년 동안 나라를 잃은 가운데 어떻게 민족의 동질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역사가들은 “신앙과 교육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완고하고 섬길 줄 몰랐지만, 훌륭한 바리새인 랍비도 있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랍비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로마가 AD 66년 예루살렘을 침공한 후, AD 70년에 멸망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었고 성전이 불탔습니다. 당시 800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전쟁으로 절반인 400만 명이 이 때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 “벤 자칼”이란 바리새인 랍비가 있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흩어지는 것까지 참을 수 있었지만, 회당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당시 로마군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랍비의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을 꿇고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장군이여! 로마와 당신은 예루살렘을 점령하려 왔지만,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오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모든 것은 장군의 뜻대로 하더라도 회당을 파괴하지 말고, 어린 아이들에게 계속 가르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장군은 랍비의 요청을 허락했고, 랍비는 “예시바”라는 회당을 세우고,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후에도 토라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한 랍비의 헌신과 희생으로,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도 자기 말과 언어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도 언어를 잃지 않았고, 국가는 없어도 민족은 없어지지 않았고, 모든 책은 없어졌어도 토라와 탈무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생존한 비결입니다.
우리가 산에 올라가서 “야호…”소리를 지르면 그것이 곧 나에게 메아리로 돌아오듯 내가 한 그 비판이 곧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청산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바리새인적인 요소는 없습니까? 자신의 부족을 살펴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바리새인적인 요소들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