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문명, 마야문명, 아즈텍문명

잉카문명, 마야문명, 아즈텍문명

중남미에서 찬란하게 꽃 피웠던 3대 문명이 있다. 페루의 잉카(Inka), 과테말라의 마야(Maya), 그리고 멕시코의 아즈텍(Azteca) 문명이다. 이들 문명은 유럽인들이 침공하기 전에 이미 찬란한 문명을 꽃 피웠지만 갑자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홀연히 사라진 문명에 대해서 여러 추측들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정확한 원인을 모른 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잉카문명의 상징, 마추픽추

잉카제국은 대략 1200년 경 페루의 한 고원에서 기원하였으며, 1438년 전성시대를 이루어 남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광대한 대륙을 통치하여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당시의 통치 영역은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와 콜롬비아의 남부,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북부 등 약 4000km에 95만㎢의 면적을 가진 대제국이었다. 현재 유네스코 유적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해발 2,430미터의 산꼭대기에 건설된 마추픽추는 잉카문명의 진수이자 상징이기도 하다. 잉카인들은 안데스 산중에 도로를 건설하여 도시를 세우고, 각 지역의 돌을 운반하여 다양한 건축물을 남겼다. 잉카문명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치와 사회 조직이다. 사회적으로는 신성한 절대군주 잉카를 받들고, 친족인 지배층과 일반평민으로 구성되는 계층사회를 형성하여 중앙집권적 전제정치가 시행되었다. 사회 제도나 계층 분화가 잘 이루어져 있었고 의학과 함께 건축 기술도 상당히 발전했다. 제국 전역에 걸쳐 광대한 도로망을 건설했고 일정한 원칙에 따라 도시를 만들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침공을 받아 제국의 조직이 무너지고 1533년에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피사로 (Francisco Pizarro 1475-1541)가 이끄는 168명의 군대에 의해 정복당했다. 당시 스페인 군대에 맞선 잉카군대는 8만 여명으로, 무려 500대 1이 넘는 전투에서 잉카 군이 허망하게 패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게 잊혔던 제국, 잉카의 영광이 세상에 다시 드러난 것은 1911년 미국의 탐험가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이 안데스 산맥의 산꼭대기에 지어진 잉카의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이에 대해 인류학자이며, 잉카 문명에 관한한 독보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킴 매쿼리가 집필한 “잉카 최후의 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잉카는 황제가 되기 위한 권력다툼으로 피를 뿌렸다.”라고 말하며, 잉카제국이 멸망한 가장 큰 이유로 내부 분열을 꼽았다. 명저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잉카제국은 판단의 착오와 오만, 그리고 무지 때문에 스스로 무덤을 팠으며, 11년 전 아즈텍이 몰락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영토에 들어온 스페인 침략자들의 실체를 너무도 몰랐다.”라고 근시안적 삶의 방식을 지적했다. 태양의 신을 섬겼던 잉카제국, 태양처럼 영원할 것 같았지만 역사에서 허망하게 사라졌다. 그럼에도 잉카제국이 어떻게 멸망했는가에 대하여 단정적으로 밝혀진바 없어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다.

마야문명의 정수, 치첸이사

마야문명은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남동부, 과테말라, 유카탄 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던 문명이다. 고대마야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나 200년에 시작된 신마야 문명은 900년까지 황금기를 구가하다가 10세기에 이르러서 갑자기 멸망하였다. 마야인들은 태양신을 중심으로 수많은 신들을 섬겼으며 사람을 제물로 드린 것이 특이하다. 마야문명의 정수로 꼽히는 피라미드 치첸이사는 천문학에 대한 지식과 수준을 가늠하게 한다. 가령 마야인은 1년을 365.242일, 달의 공전 주기를 29.530일이라 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정확한 과학 조사로 밝혀진 365.242일, 29.530일과 비교해 거의 오차가 없다. 또한 마야인들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도 사용되지 않았던 0란 숫자를 사용했다. 고대문명이 나일강이나 황하와 같은 큰 강을 끼고 발달했던 것과는 달리, 마야 문명은 독특하게도 무더운 열대우림 속에서 이룩되었다.
밀림지대와 고지대에 세워진 거대한 석조건물의 탁월성과 함께 어느 고대문명보다 훨씬 앞선 역법, 천문학, 수학 등을 사용한 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그러나 토목, 수학, 천문학, 건축, 예술, 농업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던 마야문명은 16세기 초 스페인이 침략하기 이전에 이미 어떤 전쟁의 흔적도, 다른 곳으로 이동한 흔적도 없이 연기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마야문명은 잉카문명과 달리 강력한 통치자의 지배하에 억압적으로 강대국을 이루었던 것이 아니라 안정된 농업을 기반으로 도시국가를 형성 자체적으로 발전해 간 문명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들의 멸망 원인이 반란이나 전염병, 땅의 침강, 인구 증가 등 다양한 설을 놓고 추측이 무성하지만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 역시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가운데 스위스의 하우크 박사 연구팀 역시 가뭄 때문에 마야문명이 사라졌다고 발표했다. 또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과 미국 플로리다대학 공동연구팀은 마야문명의 멸망 원인이 당시 발생한 심각한 가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유명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첨단 컴퓨터 기법으로 호수에 쌓인 침전물의 화학적 조성을 분석해 과거의 기후를 추정해낸 것이지만 여전히 마야문명이 사라진 원인은 고고학계의 최고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아즈텍문명의 뿌리, 테오티우아칸

1525년 2월 28일 아즈텍제국의 마지막 황제 쿠아우테목이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다. 아즈텍문명은 마야인의 후예들에 의해 1200년경, 지금의 멕시코시티를 중심으로 건설되어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발견한 뒤 1521년 스페인에 정복되기까지 인디언에 의해 꽃피웠던 문명이다. 그들은 주로 화전 농업을 기반으로 도시, 사회 조직, 정치, 군대를 가지고 신권정치에 기반을 두었다. 15세기 말부터 아즈텍제국은 엄격한 계급구조를 바탕으로 군소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침략, 합병하므로 멕시코의 주권자가 되었다. 그들이 만든 아즈텍문명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유적지 중의 하나인 “신들이 창조한 도시”라 불리는 테오티우아칸을 비롯 죽은 자의 거리, 상징적인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 작은 피라미드” 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 아즈텍인들은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에서 볼 수 있듯이 돌을 다듬는 솜씨는 천재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쇠붙이도 폭약도 수레도 이용하지 않은 채 20여 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들을 반듯하게 잘라내어 마치 밀가루 반죽이나 진흙덩이 다루듯이 했다. 그들의 솜씨는 오늘날 전 세계로부터 여행자들의 발길을 모으는데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특히 아즈텍문명의 우수성은 1970년에 “아즈텍 캘린더” 라고 불리는 태양의 원형석판이 발굴되면서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이 캘린더는 아즈텍인들의 우주관과 철학, 절기에 따른 농경과 제사, 1년을 280일(종교력)과 360일(태양력)로 하는 연도의 이중계산법이 모두 포괄되어 있다. 아즈텍인들은 매우 종교적인 국가로 해와 달을 위한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도시가 설계됐으며, 의인화된 태양과 전쟁의 신과 달을 여신으로 여겨졌다. 사회 계층과 직능에 따라 거주구역의 행정조직이 이루어져 있었고 자치적인 경찰과 사법조직의 발달과 귀족 평민의 교육기관도 발달되어 있었다.

이처럼 찬란했던 아즈텍제국이 1520년, 갑자기 나타난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코르테스(1484-1547)가 거느린 불과 500여명의 군대가 침입하여 채 2년도 안 되어 무너졌음은 물론 동시에 스페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떻게 아즈텍제국이 이런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은 아즈텍제국이 너무 쉽게 멸망한 원인을 정확하게 단정하지 못하지만, 내적 분열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고 있다. 서구의 제국들이 전쟁으로 패망한 것과는 달리 중남미에서 찬란하게 꽃피웠던 잉카, 마야 그리고 아즈텍문명은 내적인 분열과 다툼으로 멸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라고 말한 중국의 역사학자 사마천의 교훈이 적중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