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로마서 13:11-14 / 제목 : 나의 남은 시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2019 12.15
비행기가 이륙 후 어느 지점에 다다르게 되면 연료가 부족해 다시 출발지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지나게 됩니다. 이 지점을 “귀환불능지점”이라고 합니다. 사업이나 공부도 얼마간 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으면 다른 사업이나 학과나 진로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귀환이 불가능”합니다. 인생은 시계추처럼 반복되지 않고, 강물처럼 한번 흐르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2019년도 어느 듯 다시금 되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한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 어떻게 할 것인가?”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나의 남은 시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유다 13대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려 간절히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15년 더 살았지만, 15년을 유익하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대하32:25)“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는 건강하여 회복되고, 나라가 강성하였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내 인생이 잘 나갈 때, 건강하고 힘이 있고, 바라던 일이 성취되었을 때, 우리가 형통하고 잘 될 때, 우리 마음이 교만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즉 내가 잘되고 형통할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는가를 시험하시는 시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11절)“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90:12)“나에게 남은 시간을 계산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우리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가를 확인해 보는 방법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1:1-2)“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 우리 마음에 아직 원망과 분노 그리고 용서치 못한 것이 남아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여전히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사막에는 주로 잎사귀가 없는 가시나무나 선인장이 자랍니다. 잎사귀가 가시가 된 것은 땅이 메마르기 때문입니다. 메마름이 푸른 잎사귀를 가시로 만들 듯, 마음속에 잇는 분노와 원망이 우리의 삶은 메마들게 만듭니다. 결국 그것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남을 공격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믿음이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최후까지 남는 유일한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벧전1:7)“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우리는 한 해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 아직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원망과 미움을 제거해 주옵소서!” “주님 용납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성숙한 믿음을 소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나의 남은 시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골3: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찬송가 380장 후렴 “주의 사랑에 줄로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 사랑의 줄은 아무도 끊을 수 없습니다.
(아8:6)“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죽음조차 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며,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롬8:38-39)“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세상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8절)“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0절)“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모든 계명은 “사랑”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수없이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사랑입니다. 청혼할 때, 결혼할 때, 출근할 때, 만날 때, 헤어질 때에 듣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사랑한다.”라는 말 한마디면 족합니다. 사랑 앞에 놓을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 귀하고 소중한 것은 (요1서4:9)“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랑의 출발과 시작은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이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요한1서4: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사랑을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난 후 첫째로 넘어야 할 과제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이 과제를 넘지 못하면 다음 단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혼자가 아닌,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수양의 종교도 아니며, 나 홀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13장, 주님께서 베드로 발을 씻기려 할 때 베드로는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을 수 없나이다.” 거절하였을 때 주님은 “내가 네 발을 씻지 아니하면 너와 내가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사랑을 주고받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다”란 뜻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교만은 “사랑 받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인 사이트”포털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에 대하여 통계를 냈습니다. “사람을 계속 미워한 것, 관용을 베풀지 못한 것, 마음껏 사랑하지 못한 것, 항상 감사하지 못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구주를 믿는 자들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주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고백할 수 있길 바랍니다.
- 나의 남은 시간,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
28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을 당하던 날 사형수에게 마지막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사형수에게 5분은 아주 짧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며, 작별인사와 감사기도를 올리는데 2분을 사용하기로 하였고, 2분은 28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로 하였고, 마지막 1분은 자연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기로 하였습니다.
사형수는 눈물을 삼키며,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지난날을 돌아보며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이 끝이구나!”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리고 1분이 남았을 때 “아-! 다시 한 번 내가 살 수만 있다면…정신을 차리고 살겠다.”고 눈물을 흘릴 때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명령이 내려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등 불후의 명작을 쓴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구사일생으로 살게 된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5분을 생각하며, 순간순간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시간의 소중함”을 갖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최고 문호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 문호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정신을 잃게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3절)“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과 다툼, 시기가 우리의 정신을 잃게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 마음을 빼앗고 정신을 잃게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늘려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정신을 잃지 않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벧전4: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는데 기도만큼 유효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과거 자신이 기도하지 못하므로 큰 시험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곧 어려움이 올 테니 조심하라”고 했지만 (마26:33)“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장담하다 주님을 3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사자 굴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다6:10)“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다니엘에게 집은 밥 먹고 잠자는 곳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여러 가지 공무가 많았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집에까지 와서도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기도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방교회 4대 교부인 어거스틴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고백론 제 2권에 “나는 16세 여자를 꾀어 임신을 시켜 아들을 낳았고,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한 반항 심리로 친구들과 어울려 도적질을 일삼았으며, 한동안 이단 중의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마니교라는 혼합종교에 흠뻑 빠져들었다…”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나에게 남은 시간이 아주 짧게 남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남은 짧은 시간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살라야 합니다. 사랑하며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사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