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질그릇 같은 인생

성경 : 로마서 9 :19-24 / 제목 : 질그릇 같은 인생  /2019. 9.15

고대로부터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갖가지 답변들이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고,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성경도 갖가지로 표현 했는데, 안개와 풀의 꽃, 상한 갈대, 나그네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인간을 질그릇”이라 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므로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1. 사람과 그릇은 재료가 같다.

시중에 판매되는 그릇은 대부분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가격도 보통 5-10유로 정도면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명품 도자기나 그릇은 흙으로 만들었지만, 생각보다 비싼 편입니다. 혹 세계 3대 명품 도자기를 아십니까?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본 차이나”(웨지우드)입니다.

다음으로, “로열 코펜하겐”(플로라 다니카)로 이 제품은 최소 붓질을 1197번 할 정도로 섬세한 과정을 거쳐 출시됩니다. 그리고 독일 마이센(블루 어니언)도자기로,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진흙은 보통 30-40년 동안 비와 바람, 햇빛에서 숙성시킨 후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재료는 무엇입니까? (창1:27)“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벧전3:7)

“남편 된 자들아…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특히 여자가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질그릇에 비유한 것은 “사람은 질그릇과 같이 약하고 깨어지기 쉽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비싸고 튼튼한 그릇이라도 깨지지 않는 그릇이 없습니다. 사람 역시 강한 사람이 있겠지만 약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그릇이 깨집니까? “함부로 사용할 때”입니다. 사람 또한 누군가 말 한마디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별 것도 아닌 일에 쉽게 꺾이고, 쉽게 넘어집니다. “당신이 집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 미국의 푸자 변호사는 여자들이 이런 말을 들을 때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싸워 아버지가 이겼는데, 아버지가 더 아픕니다. 형제가 다투었는데 온 가족이 상처를 입습니다. 인간은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부딪히면 아파하는 존재이며, 탄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질그릇과 같이 상하고 깨어지기 쉬운 약한 저희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눅4: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온갖 병자와 일일이”란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 동네에 온갖 병자들”이 모였으니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을 “일일이”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집단적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개별적으로 대하셨고 끝까지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이사야의 말씀과 같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셨습니다.

성경은 삭개오, 세리 마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 앞서 몸소 가난을 겪고 시험을 당하셨기에 우리의 연약과 아픔을 더 잘 알고 계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사람과 그릇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손님이 왔을 때, 짐에 있는 크고 작은 그릇, 모두 필요합니다. 그릇이 다양하게 사용되듯, 사람도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딤후2:20) “큰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세상에는 나와 똑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도 성격도 다르고, 취미와 관심도 서로 다릅니다. 자녀를 키우는 분들은 이 사실을 더욱 실감할 것입니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너무 다른 것을 보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일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만 하고, 어떤 사람을 행동합니다. 무관심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합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재능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섬기면 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똑같게 만들지 않으시고, 재능과 성격도, 취미도 서로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서로 비교하지 말고,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금 그릇이고, 너는 은그릇이고, 너는 나무와 질그릇이다” 서로 다른 것 때문에 다투거나 우월하거나 열등감을 갖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라는 말씀입니다.

재밌고 신나는 이솝우화 가운데 “토끼와 거북이”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솝우화에서 거북이가 빠른 토끼와 경주하여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의사이며 심리학자이며 아동교육자인 몬테소리는 이솝우화를 재해석하여 아동교육에 접목시켰습니다.

그는 토끼는 땅에서, 거북은 물에서 경주한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땅에서는 토끼가 잘 달리지만 거북이는 물에서 더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이솝의 우화에서 토끼와 거북이가 땅에서 경주하는 자체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몬테소리는 참 교육이란 서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개발하게 하는 것이 참 교육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 거지 소경, 바디매오는 비록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었지만, 귀로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앞은 볼 수 없었지만, 귀와 건강한 몸이 있었습니다. 그는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을 극대화했습니다.

우리는 없는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없는 것만 생각합니다. 나는 키도 작고, 얼굴도 크고, 노래 소질도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우리가 잘 하는 것,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 것에 새삼 놀랄 것입니다.

내가 가진 적다거나 혹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교의식으로 상대적으로 빈곤을 느낄 뿐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그가 갖고 있는 한두 가지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바로 알고,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한 달란트를 받아 사용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명백하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책망한 것은 적게 남겼기 때문이 아니라 받은 것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가만히 두는 것은 분명 악한 것이며 게으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경홀히 여기는 것만큼 잘못이 없습니다. (히12:16)“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히브리 기자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은혜를 우습게 여긴 에서를 “망령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들에 대해 감사할 뿐 아니라,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사람과 그릇은 담겨진 것으로 가치가 결정된다.

그릇의 가치는 크게 두 가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첫째 그릇은 깨끗해야 사용됩니다. 아무리 비싼 그릇이라 할지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한국 소비자들이 가장 좋은 음식점으로 꼽은 첫 번째 조건이 “깔끔한 음식점”이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고 유능하다고 해도 깨끗지 못하면 사용될 수 없습니다. (딤후2:21)“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성경에서 영적, 도덕적으로 깨끗한 모델로 요셉과 다니엘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육체적으로 순결을 지켰고, 다니엘은 믿음을 지킴으로 젊은 시절부터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적, 도덕적으로 깨끗했던 그들은 애굽과 바벨론 대제국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탁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정직하고 깨끗할 수는 있습니다.

오늘날 주변은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것 때문에 불쾌하거나 크게 기분 나빠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 때문에 시비하거나 트집 잡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직장과 사회에서, 친구사이, 대인관계에서 좀 정직하고, 바르게 살려고 할 때, 반드시 시비를 걸어옵니다. 마치 욥의 친구들과 같이 “그래 너 혼자만 의롭고 잘났다”이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둘째, 그릇은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집니다. 밥을 담으면 밥그릇, 물을 담으면 물그릇, 휴지를 담으면 휴지통이 됩니다. 저희 집에 예쁜 찻잔이 있었는데, 화분 받침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후 저는 그것을 찻잔이라 부르지 않고, 화분받침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릇은 무엇이 담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사람의 이름과 가치가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을 무신론자라 부르며, 그 마음에 공산주의 사상을 담으면 공산주의자라 부릅니다.

또한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됩니다. (고후4: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그 속에 보배를 담았기에 “보배로운 그릇”이 된 것입니다.

요즘 등장한 신조어 가운데 “lookism”이란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은 “외모 지상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외적인 요소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잣대가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외적인 요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겸손을 담으면 겸손의 사람이 됩니다. 믿음을 담으면 믿음의 사람이, 사랑을 담으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내 마음에 예수를 담으면 예수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입었을 때 “성령의 사람”이라 불었습니다. 반면 세속적이고, 분쟁을 일삼는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육체의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충만으로 채울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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