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베버, 케인스, 마르크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토빈은 경제학을 한마디로 “인센티브”(동기)라고 했다. 경제에서 동기는 사회구조와 정치구조와 직결되어 있다. 경제와 정치를 어떻게 조화하느냐? 둘 중 어느 것을 우위에 두느냐, 아니면 경제와 정치를 통합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을, 케인스는 “거시 경제론”,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피력했다.
막스 베버, “자본주의 정신은 잠언 22:29이다.”
“우리는 그에 필적할 만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막스 베버의(Max Weber, 1864-1920)묘비명이다. 베버의 저작 가운데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론에서 탁월한 고전으로 손꼽힌다. 베버가 그의 이론을 제시할 무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물질적인 하부 구조가 정신적인 상부 구조를 결정한다.”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자본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특히 칼빈주의인 영국의 청교도 정신과 윤리가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며 정신이라고 반박했다.
자본주의 정신은 특히 개인이 가진 직업을 통해 여실히 나타나는데, 직업은 절대자인 신으로부터 받은 임무(소명, calling)로 알고 근면,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직업을 통해 사욕이 아닌 의무로서 엄격한 책임에 기초를 둔 부의 획득은 신의 축복인 동시에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평가했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과 이론의 중심은 미국 사상가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의 말을 인용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시간과 신용이 곧 돈이다. 돈은 스스로 번식한다. 거래에 있어 정직과 시간을 지키는 것은 미덕이다. 신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소한 일들에도 조심해야 한다. 수입과 지출을 잘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베버의 이론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반대하였으며, 가톨릭교회 또한 베버가 근대 경제 발전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비판함으로 가톨릭 역사가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베버가 주장한 학설과 이론을 뒤엎을 수 있는 구체적인 학문적 업적을 내놓은 학자가 거의 없다. 다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장한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대 윤리적 자본주의 정신의 근원은 성경(잠 22:29)이다.”라고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해 남긴 명언은 아직도 유효하게 통용되고 있다.
케인스, “자본주의는 정부의 역할이 핵심이다.”
“거시 경제학의 아버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로 불리는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칼 마르크스가 죽던 해에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케인스는 “자본주의는 심각한 병에 걸릴 수 있다.”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29년 실제로 세계 대공황이 발생했고, 세계경제는 사상 최악으로 침체에 빠졌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러다 정말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게 아닌가?”라는 위기의식에 휩싸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 1919년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승전국과 패전국 대표들이 모여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서 승전국들은 패전한 독일에 1년 총생산(GDP)보다 많은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서명했다. 당사자인 독일은 물론, 영국대표로 참석했던 케인스는 “베르사유 조약은 너무 가혹하여 독일을 절망에 빠뜨리고, 독일은 물론 세계 경제를 파탄 낼 것”이라며, 독일의 경제 회복을 위해 감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케인스의 예견대로 독일은 배상금을 갚기 위해 화폐를 마구 찍어냈고, 그 결과 물가 상승과 실업자들이 대규모로 발생하면서 독일 경제는 급속도로 극심한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대혼란에 빠진 독일은 전쟁에 승리한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해 분노했고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와 나치당이 정권을 잡는데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39년 나치 독일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불과 20년 만에 또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런 와중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심각한 병에 걸려 종말하게 될 것”이라 말했지만, 케인스는 자본주의를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정부의 보완책(공공지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케인스가 내놓은 거시 경제론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공황으로부터 탈출을 위해 국가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 정책)을 통해 실현되었다. 1933년 루스벨트대통령은 케인스가 제안한 처방과 같이 정부가 국내 경제에 적극 개입하였고, 미국은 독일에 대해 8억 마르크 정도의 차관(1924년)과 전쟁 배상금의 약 1/4분 정도를 탕감(1929년)해 주었다. 지금 서구와 한국에서 시도하고 있는 다수의 복지정책들 중에는 케인스의 경제론에 근거한 것들이 많이 참고 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정부가 지출이나 세금을 통해 경기 물가를 조절하기 위해서 케인스의 경제론을 적용하고 있다. 케인스는 거시 경제학의 아버지답게 거시적인 안목과 간접적인 경제론을 강조하였다. 이런 이유로 “장기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마르크스, “필요에 따라 분배받고, 능력에 따라 일한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독일 훔볼트 대학 본 건물 중앙계단에 적혀 있는 마르크스의 “테제”로, 그의 사상이 압축되어 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a, 1818-1883는 독일의 철학자, 경제, 역사, 사회, 정치, 언론, 사회주의 혁명가로, 법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그의 대표작은 1848년 출간된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이다. 그가 자본론에서 주장한 핵심은 “노동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를 없애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였다. 이런 그의 경제, 정치, 철학사상은 후대의 경제사, 정치사에 거대한 영향을 남겼으며, 그의 사회 경제 정치이론을 통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다. 그는 자본주의는 내재된 모순으로 인해 반드시 몰락할 수밖에 없으며 노동자 계급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이 도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회계층의 양극화는 체제 붕괴의 필요조건이 된다.”고 자신이 예측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소극적으로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 싸우라고 선동하고 있다. 그 또한 평생을 바쳐 저술과 출판 활동하며 노동자들이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무너뜨려 사회주의 경제를 이루도록 매진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저술할 무렵 유럽은 권력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흘러들어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것을 목도한 마르크스는 유럽의 자본주의 모순은 결국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된 유럽에서는 어떤 계급투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러시아에서 레닌이 아닌 농민의 손에 의해 혁명이 일어났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책과 이론에 영향을 받은 레닌(1870-1924)과 그가 이끈 다수파인 볼셰비키 정당이 억압받고 있던 민중들의 혁명을 이용하여 소련을 공산화하는데 성공했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는 필요에 따라 분배받고, 능력에 따라 일한다.”라는 사회주의 경제구조 원칙을 천명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인간의 본성과 세계 경제구조는 “함께 소유하고 함께 생산하는 공산(共産)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필요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분배하는 자본주의 구조”를 지향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후대 수많은 학자, 노동조합, 예술가, 정치가들이 영향을 받거나 이론을 재해석하여 변형, 변용하여 사용해 왔다. 오늘날 시장경제 체제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는 여러 정책들 가운데 의료보험을 비롯 각종 사회보장제도 등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변형하여 시행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