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누가복음 22 : 54 – 62
제목 : 믿음에서 넘어지게 하는 요소들 / 2019. 6.30
베드로는 많은 능력과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장점은 열정입니다. 그에게는 불타는 열정이 있었고,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수영도 못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바다에 뛰어내리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앞서 “주를 따르겠다.”고 장담하였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세 번씩이나 장담했지만,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오늘은 베드로가 믿음에서 넘어진 사실을 통해 “믿음에서 넘어지게 하는 요소들”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주님과의 먼 거리에서 넘어지다.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거리는 11M라고 합니다. 축구경기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할 때 승부차기를 통해 우승을 결정합니다. 승부차기는 골문에서 11M로, 이 거리는 선수나 골키퍼 모두에게 최대의 심리적 압박을 받는데, 이를 “잔인한 러시안 룰렛”이라고도 부릅니다.
주님께서 재판받기 위해 대제사장의 집으로 잡혀 갈 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행동했습니다. (54절)“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멀찍이 따라가다.” 이것은 유리할 때 뒤따라갈 수도 있지만 불리할 때 도망가겠다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거리를 유지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멀찍이 주님을 따라간 베드로는 결국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57절)“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전혀 알지 못하노라”
이삭은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나자 헤브론에 장사한 후 흉년이 들었습니다. 100년 만에 찾아온 큰 흉년이었습니다. 이삭은 풍족한 애굽으로 가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창26:2)“너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하셨기에 일단 “그랄”로 옮겼습니다. “그랄”은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로, 상황에 따라 애굽으로 내려가기 쉬운 곳을 택했습니다.
이삭이 택한 “그랄”은 영적으로 “회색지대”로, 오늘날의 표현으로 “그랄”은 “한발은 교회, 한발은 세상에 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그랄에서 어떤 일을 만났습니까? (창26:16)“네가 우리보다 강성한 즉, 우리를 떠나가라” 블레셋 아비멜렉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하였고, 힘겹게 팠던 7개의 우물을 모두 빼앗기고 쫓겨났습니다.
현대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모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세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도 아닌, 하나님도 섬기면서 세상도 섬기는 어정쩡하게 중간지대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생활이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5:21-24)“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에녹은 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란 증거를 얻었습니다.
“동행”이란 “함께 걷다.”라는 뜻입니다. 동행이란 매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대화하고 하나님과 함께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삶이란 어떤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신앙생활이 어렵고 피곤한 것입니다.
부부도 오래 떨어져 있으면 거리가 생기고, 사랑이 식어집니다. 그래서 영국의 워즈 워즈는 아내란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매일의 양식이 되는 아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매일 동행하지 않으면 믿음에서 떨어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 말씀과 기도생활을 등한히 하게 되면 자연히 우리의 믿음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15:5)“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마귀는 우리가 주님과 거리를 둘 때에 그 틈새를 파고 들어옵니다. 우리가 주님과 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더욱 힘쓰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악인의 자리에서 넘어지다.
주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고기를 잡는 거물과 알곡과 가라지로 비유하셨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을 때, 고기만 잡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잡동사니들이 올라옵니다. 또한 농부가 가라지를 뿌리지 않았음에도 곡식사이에 가라지가 심겨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을 떠나 살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악함으로 세상을 떠나야 하겠다든지, 악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악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겠다는 사람을 우리는 현실도피주의자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55절)“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그러나 그곳에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지 못한 것이나,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고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이 악하다는 이유로 세상을 적대시 하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일찍이 요셉은 악의 상징인 바로의 왕궁에 거하며 총리가 되었고(창41:41), 모세 또한 바로의 왕궁에서 모든 학문을 배웠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과 벨사살 왕의 신하로서 자문을 했고, 다리오 왕 때 총리를 했으며,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의 술 관원이 됐으며, 오바댜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했던 아합과 이세벨의 신하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먹이고 보호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들이 악하다는 이유로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하나님 백성의 맛과 향기를 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신앙의 불모지인 직장과 사회로 들어가게 하셨는지? 믿지 않는 집안으로 시집가게 하셨는지? 불신자 이웃들과 함께 살게 하셨는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디를 가든지 불신사회와 동화되지 않으면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다소금의 농도는 보통 2.7 % 정도 됩니다. 3% 정도 되는 소금이 모든 지구의 오염을 정화하고, 모든 생명체를 살리고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근거로 미국 버클리 대학 로버트 벨리교수는 “어느 국가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그 국민의 2%가 새로운 비전을 가지면, 한 나라의 문화가 달라질 수가 있다”고 한 말은 옳은 말입니다.
사해바다란 “죽은 바다.”란 뜻입니다. 사해바다는 소금 농도는 24%로, 소금이 한 곳에 뭉쳐 있어 죽은 바다가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 한 조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교회 안에서 인간관계가 불편해서”가 53%로 나타났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여 있을 때 “사해바다”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매주일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습니까? 힘과 능력을 얻어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속에서 베드로와 같이 넘어지지 않고, 식어지고 약해진 믿음을 다시 회복하고, 직장과 사회, 학교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모임은 반드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금이 너무 뭉쳐있는 사해바다와 같이 아무 생명도 살릴 수 없습니다.
- 믿음을 준비하지 못함으로 넘어졌습니다.
베드로는 기도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46절)“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베드로가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57절)“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고 어린 계집종까지 무서워하며 3년 동안 은혜를 받은 주님을 3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사자 굴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다6:10)“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에게 집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곳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여러 가지 공무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집에까지 와서도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기도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아담과 화와가 유혹하였을 때에 기도를 하였겠는가? 아브라함이 후처 하갈을 얻기 전에 기도하였는가? 다윗의 생애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순간은 기도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일로 다투기 전에 기도하였는가?
기도가 없는 것은 재앙입니다. 초대교회는 기도를 대신할 만한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6:2-4)“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니”
목마를 때에 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듯, 기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도를 덜하고 성경을 더 읽으면 안 됩니까?”안됩니다. “기도대신 봉사하면 안 될까?”이것도 안 됩니다. 기도는 오직 기도로만 대신할 수 있습니다.
훗날 기도 능력과 중요성을 깨달은 베드로가 무엇이라 고백했습니까? (벧전4: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땀 흘리며 열심히 심었는데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까?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까?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일어서려면 기도해야합니다.
기도와 휴대전화는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 휴대전화는 정기적으로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전혀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둘째 휴대전화는 지하실 같은 곳에서 통화 장애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통화가 더 잘됩니다.
셋째 휴대전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금전 손실이 크지만 기도는 시간이 길수록 이익이 큽니다. 다섯째, 그럼에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것보다 기도를 짧게 하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베드로와 같이 믿음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거리를 두었기에 넘어 졌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믿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평소 기도로 무장하지 못함으로 믿음에서 넘어 졌습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 비록 어렵고 힘들어도 기도로 무장하여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힘쓰는 성도들이 되길 주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