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자녀를 위해 자존심을 버릴 수 있다.

성경 : 마태복음 15 : 21-28 / 요한복음 4 : 46-54 제목 :

부모는 자녀를 위해 자존심을 버릴 수 있다. / 2019. 5.12(어버이 주일)

양주동 작사와 이홍렬씨가 작곡한 “어머니의 마음” 이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셨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우리 다 함께 1절만 불러 보고, 설교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한국 부모들에게 “자녀란 무엇인가?” 물어 보았습니다. “장가간 아들은 큰 도둑이며, 시집간 딸은 예쁜 도둑, 며느리는 좀도둑, 손자들은 떼강도,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 그림자,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딸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낳을 땐 1촌, 대학가면 4촌, 장가가면 사돈의 8촌이 된다.” 오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아픕니다.

두 본문에서 자식을 사랑한 부모를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왕의 신하로, 오늘날 장관 정도라고 할 수 있으며, 두 번째 본문에서 평범한 어머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부모는 자녀를 위해 자존심을 버릴 수 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세상의 지위도 내려놓을 수 있다. (4:46-54)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47절)“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왕의 신하가 주님께 나오게 된 동기는 자신의 아들이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성애가 주님 앞에 나오게 한 것입니다. 아들의 병을 고치는데, 원색적인 본심을 드러내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혹 예수가 아들의 병을 고쳐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나온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평소 예수님이 여러 병자들을 고쳤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 때까지는 그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이 병이 들었을 때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왕의 신하는 지위나 체면이 문제되지 않았고, 그러기에 가버나움에서 갈릴리까지 38Km 되는 먼 거리를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무름을 꿇고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고 간청을 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성애가 왕의 신하를 겸손하게 했고,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왕의 신하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아버지라는 이름 때문에 기꺼이 자신의 지위를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눅15:22-23)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방탕한 자에게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아버지가 계십니다. 범죄 한 우리를 친히 자녀로 삼아주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며, 지금껏 양육해 주신 땅위에 아버지가 계십니다. 자식하나 잘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 자식을 위해 세상의 지위쯤이야 내려놓을 수 있는 아버지를 모르는 척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보다 많이 배웠다고 해서 “이제 무식한 소리 그만 하세요!” 자립한다고 “아버지가 제게 해 준 것이 뭐 있어요!”라는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지위를 내려놓은 분이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1.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자존심을 버릴 수 있다. (15:21-28)

미국 과학전문지 웹사이트 라이브 사이언스는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당연히 대접받아야 할 “5가지 과학적 이유” 가운데 첫째로,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실제 여성이 남성보다 2.5배 많이 장애를 겪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자녀를 나은 이유만으로 자녀로부터 평생 발 마사지를 받을 자격이 있다.” 라고 했습니다.

 

마태15장은 자식을 사랑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어머니는 귀신들린 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15:26)“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다”하셨을 때 그 어머니는 “주여 옳습니다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나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개와 같이 미천한 존재가 되는 것마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부스러기를 구했지만, 이미 자신은 부스러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서 자신은 마치 아무 것도 아닌 티끌과 같이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를 지키려는 자존감이 있습니다. 어쩌면 자존심은 콘크리트 장벽보다 무너뜨리기 힘든 장벽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자존심을 포기할 수 있는 대상은 자녀입니다. 부부는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하지만 자식에게는 가능합니다.

 

자녀가 잘되는 일이라면 좋아하는 술 담배도 끊고, 자녀를 위한다면 도둑질 외 다 하겠다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자식이 잘되는 일이라면 부모에게는 자존심이나 체면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도 여러분을 키우실 때 다 이렇게 하신 것을 아십니까? 자식을 웃도록 부모님은 남몰래 눈물 흘린 것을 알고 있습니까? 내가 오늘 누리는 것을 위해서 나의 반대편에서 부모님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자식들의 배를 더 부르게 하기 위해서 부모님은 덜 잡수셨고, 우리들의 입에 좀 더 맛있고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부모님에 입에는 언제나 맛없고 거친 것을 드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입히기 위해서 부모님은 언제나 똑같은 옷을 1년, 12달 걸치고 계셨습니다. 자식들에게는 무식한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우리 부모님은 사람들로부터 무식하다는 소리를 수없이 듣곤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자식을 위해 스스로 짓밟힐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서고금의 사람들은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여자는 젊어 한 때 곱지만, 어머니는 영원히 아름답다. 여자는 자신을 돋보이려고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돋보이려고 한다…여자는 수 없이 많지만, 어머니는 오직 하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1:8-9)“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아버지의 가르침과 어머니의 가르침이 곧 가장 위대한 면류관이요 금목걸이라 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곧 나의 면류관이며, 목걸이란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잘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부모는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운다.

어떤 사람이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나지만, 너를 대신해 인생을 살아줄 수는 없다. 너를 교육시켜줄 수 있지만, 배우는 일은 너의 몫이다. 너에게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네 곁에서 이끌어줄 수는 없다.

 

너에게 자유를 허락할 수는 있지만, 네가 행한 자유에 대한 책임은 너의 것이다. 너에게 옳고 그른 것은 가르칠 수는 있지만, 항상 너 대신 결정을 내려줄 수는 없다. 너에게 좋은 옷을 사줄 수는 있지만,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사줄 수는 없다. 너에게 충고를 해줄 수는 있지만, 충고를 받아들이는 건 네 몫이다. 너에게 효를 가르칠 수는 있지만, 너에게 효를 강요할 수는 없다.”

 

효를 가르칠 수 있지만, 효를 강요할 수는 없다.” 이것이 부모의 한계이며, 부모의 고민이며, 아픔인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아픔은 자식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지만, 정작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많이 우는 것입니다. 슬프고 아파서 우는 것도 있지만, 대신 할 수 없기에 우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식들이 서로 다투고, 형제들이 공모하여 요셉을 팔고 난 후에 죽었다고 했을 때 야곱은 슬피 울었습니다. (창37: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반면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기뻐하였습니다. (창46: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열 자녀들이 불효하였을 때 부모는 크게 울었지만 그 울음을 그치게 하고, 회복한 것도 자식이었습니다.

 

여러분! 부모는 좀 가난하고, 못 배워도 형제와 서로 화목 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좋지 않는 형님이고 동생이지만, 부모에게는 모두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형제가 불화처럼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아버지를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은 큰아들이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효는 조금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효는 큰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화목하며 살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30세가 될 때까지 목수로서 부모를 부양했으며, 십자가를 지실 때도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겨 부양하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위해 세상의 지위마저 내려놓은 아버지,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존심마저 포기한 어머니를

울게 하지 않기를 바라며, 더욱 공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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