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한니발(BC247-183)의 도시, 카르타고는 3차 포에니전쟁(BC149-146)으로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했다. 이로서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카르타고의 주인은 로마에게 넘어갔다. 그럼에도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영적전투를 벌여 카르타고를 신앙으로 바로 세운 영적 영웅들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라는 말은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0-225)에게도 해당된다. 그는 폴리갑의 순교를 눈으로 지켜보면서 훗날 그의 저서에서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런 이유로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와 세상의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을, 세상의 지식과 철학과의 조화보다는 기독교 진리의 보존과 분리를 주장했다. 또한 그는 “박해가 교회를 소멸시키지 못한다.”라며 타협보다는 거룩과 순교를 강조했다. 그는 한 때 극단적 금욕주의와 몬타누스주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리스도의 육신론”과 같은 책을 통해 초대 기독교의 혼란을 바로잡고 기독론의 기초를 놓는데 큰 역할을 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주장한 기독론은 그리스도는 양성, 즉 신성과 인성을 가진 한 인격체이심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그는 “신약과 구약”이라는 말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함으로 조직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가 말한 삼위일체 개념은 “하나의 본질과 세 위격(位格)”으로, 즉 삼위 하나님은 한 본질과 한 실제 그리고 한 능력이시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삼위의 개념은 훗날 니케아 종교회의와 아우구스티누스가 집필한 대작 “삼위일체에 대하여”라는 교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교회의 수호자로 불리는 이레니우스와 함께 영지주의를 강력히 반대하며 헬라철학이 신학에 도입되는 것과 성경과 철학이 혼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사도적 권위 위에 세워진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는 것을 이단으로 정의했다. 그는 오리겐과는 달리 그리스 철학을 증오하고 강력히 비판하며 성경 밖의 문헌에 근거한 신학의 추구를 거부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 가운데 가장 유력한 저서는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변증”(Apology)이다. “변증 40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신들의 박해가 아무리 교묘할지라도 그것은 당신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대신에…당신들이 우리를 쓰러뜨릴 때마다 우리의 수는 더 늘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키프리아누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Cyprianus, 200-258)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제자로, 또는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순교했다. 그는 테르툴리아누스처럼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출신으로 그리스어보다는 라틴어를 사용한 교부이다. 그는 교회를 “성도들의 어머니”로 묘사하며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종교개혁이후에도 여전히 로마교회는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로마교회의 우위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에 기인한다. 그러나 키프리아누스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한 말은 교회가 박해 이후에 분열을 막고 교회 밖으로 나간 이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로마교회는 키프리아누스의 본래적인 의도와 상관없이 오직 가톨릭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잘못 사용해 왔다. 또한 키프리아누스가 강조한 것은 감독을 중심한 교회의 통일성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알아야 하는 것은 감독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과 교회가 감독 안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만일 감독과 함께 있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교회 안에 있지 않는 것이다.” 키프리아누스는 당시 박해로 감독이 없는 틈을 타서 교회를 분리하는 이단들을 막기 위해 감독직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훗날 로마교회는 이를 토대로 교회의 보편성과 감독정치를 체계화하는 결정적인 발판으로 삼았다. 로마교회의 감독정치는 키프리아누스가 최초로 감독교회론을 주장한 이후 중세기부터 지금까지 대략 4-500년 동안, 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까지 지속되어 왔다.
2차 바티칸 공의회란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개회되고, 바오로 6세에 의해 폐회된 로마교회의 근대 공의회를 일컫는 말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주목받는 것은 16세기 트렌트 공의회의 이후 400년간 지켜온 로마교회가 중요한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변화는 지금껏 로마교회가 인정하지 않은 개신교회 성도들을 “형제들” 즉,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면서 자신들에게도 분열의 책임이 있음을 시인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평신도의 사도직”에 관한 것으로, 이전과 달리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평신도에게도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을 적용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에 천명한 만인제사장이라는 원리를 수용한 셈이다. 그러나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로마교회만이 보편교회라는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았으며, 마리아 숭배, 그리고 무슬림까지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적인 태도는 개신교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음을 재확인해 주었다. 로마교회 입장에서 많은 것을 양보하여 교회가 화합했다고 주장하지만 2차 바티칸공의회는 여전히 반 복음적이고, 비 복음적인 요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들로 넘쳐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오! 진리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그가 출생하기 전 40여 년 쯤 인 313년에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었고, 장년기 시절인 392년에 국교가 됐으며,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20여년 쯤 지났을 때 로마제국이 사라져 버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도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중세기 천 동안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 칭함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방교회의 아버지, 그리고 중세 시대의 신학과 사상을 지배한 사람으로, 개신교와 로마교회 등 서방 기독교에서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그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라고도 불리며, 그의 이름은 “덕망 있는”이란 뜻의 라틴어 아우구스툼(Augustum)에서 유래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철학교수 화이트헤드가 “현대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현대의 모든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석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10세기가 지났을 때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과 같은 종교 개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작품과 많은 사상들은 대부분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기원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물론 서양 철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sm)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신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과 일반 학문을 함께 연구하는 중세의 스콜라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 있어 중요하고 대표적인 신학적인 공헌은 “은총론”이다. 펠라기우스의 선행구원론을 반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론을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교회관과 성례관은 로마교회 교리의 발전에 한 몫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주요 저작으로 “고백론”을 비롯 “행복론”, “삼위일체론” 그리고 “자유의지론” 등이다. 그의 3대 대표작으로는 그의 삶과 신앙을 담은 “고백록”과 그의 필생의 대작(413-426)으로 완성한 역사철학인 “신의 도성”과 그리고 “삼위일체론”이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1883-1969)는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무수히 많으나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셋을 꼽는다면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와 그리고 칸트”라고 말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그의 “고백론”(고백론 10,27,38)에서 남긴 말은 그의 최고의 신학적인 유언이 되었다. “오, 진리여! 그토록 오래,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