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빌립보서 4 : 10-13 / 제목 : 세상의 가치를 상대화하라. 2019. 3.31
제가 지난 주간 설교준비를 하면서 저의 책상을 살펴보았는데 참으로 많은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볼펜을 비롯한 필기도구만 30여 점 이상이 되었고, 시계, 사진, 칼, 가위, 자 등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잡동사니들로 채워져 있었고, 책상 서랍은 아예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상대화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발은 나이키가 아니면 안 신어! 그것 없으면 절대로 살수 없어” 이것이 절대화라면, “그것 없어도 괜찮아”라는 태도가 상대화입니다. 절대화는 많은 폐단을 가져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우리가 상대화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소유의 가치를 상대화하라.
우리가 한 번씩 이사를 하다보면 짐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기관에서 낸 통계 자료를 보면,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물건이 무려 3500가지나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을 대략 계산해도 이보다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바울은 로마감옥, 가택연금 상태에 있을 때 빌립보 성도들이 선교헌금을 보내왔습니다. 선교헌금을 받은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11절)“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자족”은 “현재 상황에 지배되지 않고 지배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자족한다고 해서 “부족함이 없다거나 괴로움이 없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성도들로부터 선교헌금을 받았을 때 (14절)“너희가 내 괴로움에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한 것을 보면 후원금으로 생활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모자람 때문에 혹 불편함은 있겠지만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13절)“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의지 때문이거나 나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는 많은 교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의 공급자이시기에 자족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존 메가스”가 지은 책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교회가 회사처럼 경영원리를 도입하고 있으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5천명이상 모였지만 숫자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큰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말씀이 있습니다. (행3:6)“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예루살렘교회가 무엇을 중요시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돈도 건물도, 조직이나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돈도 백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좋은 교회란 돈이 많고, 교인이 많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가지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며, 배고픈 자를 먹이셨지만, 모든 사람을 충족시켜 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고 자족하도록 위함입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어도 주님과 함께할 때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인생의 길이 있고, 참 소망이 있음을 알게 함입니다.
사람들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고 불평합니다. 사실 우리가 없는 것도 많지만, 있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 것에 새삼 놀랄 것입니다. (고전7: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세상의 소유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벧후1: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부터 신기한 능력과 생명과 그리고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도 자족할 수 있길 바랍니다.
만족의 가치를 상대화하라.
바울은 감옥에 있었기에 누구보다 만족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12절)“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고 하면서 비록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오히려 성도들에게 “주안에서 기뻐하라”라고 했습니다.
“토니워”가 출판한 “욕구, 새로운 종교”란 책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것은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당을 찾고, 높은 암자를 찾는 것도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도 타종교처럼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두 삶의 양식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소유하는 삶이 있고,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삶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 합니다. 원함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를 따라 살 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 출퇴근하기 위해 필요한 주차 공간은 하나만 있으면 족하고,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볼펜 1개면 족합니다.
그러나 원함을 따라 살 때 세상 모든 것을 가져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인생 최대, 최고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전2:11)“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져보았지만, 모두 “헛되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헛되다”란 “공허하다. 속이 텅 빈”이란 뜻입니다. 바젤대학교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교수인 “칼 융”은 일생에서 가장 큰 두 번의 큰 전환기가 있는데, 청소년기와 중년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40세에서 60세까지를 중년기라고 했습니다. 중년기만 아니라 많은 현대인들 역시 알코올, 마약, 게임, 등으로 공허함을 채우고자 하지만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한 시기가 바로 중년기입니다. 다윗은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는 전쟁 중이었지만 그것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밧세바 또한 왕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서 목욕을 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왕이 불렀을 때 밧세바가 망설였다는 성경구절이 없습니다. 그가 불륜으로 아기를 가졌을 때 죄책감 같은 것을 가졌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로, 인간 중심의 심리학을 개발한 “칼 로저스”는 현대인이 공허하고 고독한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가? 모르기 때문이며, 자신을 맡길 만한 대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 즉 공백이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다 마음속에 공백이 있다. 그런데 이 공백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채울 수 있다”
(요6:35)“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전에는 텅 빈 마음을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는 것으로 우리 마음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공허함의 해답은 하나님이십니다. (고후3:5)“우리가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하나님만이 나의 공허함을 채워 주실 분임을 믿고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현재의 상황을 상대화하라.
바울이 처한 환경과 상황은 최악입니다. 바울은 로마감옥에 오기까지 많은 사람의 비난과 재판과 매도 맞았고, 죽음의 위기를 넘겼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2절)“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고백한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합니다. 동물과 비교해도 너무 제약이 많습니다. 사람은 굶은 상태로 12일 살 수 있지만, 개는 20일, 뱀은 2년, 거북이는 500일 동안 먹지 않고도 살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100살까지 산다고 하지만, 거북이는 무려 300년 동안 산다고 합니다.
힘이나 능력 면에서도 비교되지 않습니다. 말과 달리기를 하거나, 소가 끄는 수레를 사람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사자는 고사하고 개와 싸워도 이길 수 없습니다. 자립성도 짐승들은 대부분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떠나 독립하지만, 사람은 30년 양육을 받아도 미숙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의식주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경우 취업과 직장의 문은 절벽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한국의 경우 대학졸업 후 공무원이 되려면 81: 1, 70:1의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지난 2018년 초에 한국의 대기업에서 5만 명 정도 직원을 채용하겠다고 발표를 했는데, 절반도 채용하지 못함으로 실업가 최대로 늘어났습니다.
스페인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인으로 살아 갈때 제약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의 현실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세는 바울이 주신 교훈입니다.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등 수많은 은혜로운 찬송 시를 남긴“ 화니 제인 클로스 비”여사는 생후 8개월부터 95세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경으로 살았지만 무려 8천여 곡이나 되는 많은 찬송 시를 남겼습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은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확신은 소유나 만족, 상황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족하는 가운데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소유와 본능적인 충족과 그리고 환경과 상황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고전7: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슬픔도 기쁨도 한 순간이므로 너무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 아니면 안 돼”“이것 없으면 절대로 살수 없어”라고 절대화하기보다 “그것 없어도 괜찮아”“내가 처한 상황이 어려워도 주님이 나의 모든 공급자”라는 믿음을 갖고 세상의 가치에 대해 상대화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