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중에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성경 : 시편 107 : 23-30

제목 : 환난 중에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1. 3.10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수없이 고민하며 질문한 내용으로, 나이 50이 되어서야 하나님을 발견하고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방황했던 시절 자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한 나그네가 광야 길을 걷다가 갑자기 맹수를 만났습니다. 나그네는 맹수를 피하여 웅덩이로 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웅덩이에는 큰 뱀이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체념하려는 순간, 옆에 마침 큰 나무 가지가 뻗어 있어 가지를 붙잡았습니다.

 

나그네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아래를 보니, 이번에는 흰쥐와 검은 쥐들이 자신이 붙잡고 있는 나무 밑뿌리를 갉아먹고 있어, 언제 나무 가지에서 떨어질지 몰랐습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 나무 사이에서 벌들이 꿀을 만들어 놓은 것이 보고 꿀을 핥아 먹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환난 중에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인생을 살면서 만나게 되는 것들

시편 107편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어떤 일들을 만나는가?” 4가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모습은 광야와 사막과 같은 삶”(4-9)입니다. (4절)“광야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광야와 사막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부족한 곳입니다. 게다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는 곳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윗도, 예수님도, 그리고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삶을 체험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열려 있는 곳은 오직 하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광야와 같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모습은 매임”(10-16)입니다. (10절)“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쇠사슬에 매임은”

매임의 대표적인 것이 감옥 입니다. 감옥 만큼 답답한 곳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곳입니다. 요셉은 무고하게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다니엘도 감옥보다 무서운 사자굴에 던져 졌고, 바울과 실라도 어이없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누명을 벗어 감옥에서 나오려고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누명을 쓰고 “할 말을 잃고, 어이없는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세 번째 모습은 병상입니다. (17-22절)(18절)“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병이 무서운 것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 13대,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당신은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은 후 얼굴을 벽을 향하여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네 번째 모습은 광풍입니다. (23-32절) (25절)“광풍으로 영혼이 녹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 도다.”깊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인생입니다. 오늘 시인은 우리가 세상에서 이와 같은 것들을 만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광야와 사막입니까?”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감옥 입니까? 몸과 마음이 지쳐 있고, 아픕니까? 아니면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까?

흔히들 인생을 항해하는 것에 비유해 왔습니다. 존 번연이 이 주제로 “천로역정”이라는 작품을 썼고, 호머의 “오디세이”도 같은 주제로 작품을 썼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여성운동가요 교육가인 김활란 박사가 작시한 찬송가에서 우리 인생을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고 같은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바다가 언제, 폭풍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듯이 우리 인생 역시 내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바다를 무서워하듯 사람들 또한 인생의 길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풍랑이 언제 올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1. 인생을 살면서 광야와 매임, 질병과 풍랑을 만났을 때에

시인은 “광야사막 길에서 방황할 때” (6절)“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쇠사슬에 매였을 때” (13절)“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고통에서 구원하시고”, “사망의 문에 이르렀을 때에”

 

(19절)“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그리고 “광풍으로 영혼이 녹을 때” (28절)“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고통에서 건져 내시고” 사막과 매임, 질병과 풍랑에 대한 해답은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큰 풍랑을 일으킨 경우가 세 번 있는데,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마가복음 4장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로 갔을 때에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이 광풍은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사도행전 27장, 바울이 로마로 호송될 때 지중해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알렉산드리아”호가 파선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에 도착하여 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추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구원 얻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 큰 풍랑은 도망가는 요나를 막아 니느웨에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내린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벤허”가 세운 최다 수상 기록을 낸 “타이타닉” 영화를 보면 배가 빙산에 부딪쳐 침몰해 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몸부림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 볼테르조차 “어떤 인간도 바다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풍랑을 만나면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붙잡게 됩니다.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붙잡아야 할 것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약5:13절)“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고난을 당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너희 중에 병든자가 있느냐” (15-16절)“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우리가 함께 병든 자를 위해 합심해서 기도한다면 그 질병이 물러 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막2:1-12)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이 있습니다.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메고 왔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한 사람의 믿음이 아닌 “저희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즉 중풍병자와 같이 있었던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복음성가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 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있습니다. 중보기도 때문에 우리가 지금도 강건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가 이웃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고, 우리가 드리는 중보기도를 통해 치유될 수도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고난과 질병에 대한 해답은 기도입니다.

 

  1.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실까? (30절)“그들이 평온함으로 여호와께서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시인은 비록 광야와 감옥, 질병과 풍랑으로 환란과 고통 가운데 두시기도 하시지만,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건지셨고, 구원하셨고, 평온하게 하셨음에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주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나사로를 죽은 자를 직접 살리시기도 하지만 또 다른 많은 방법들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기준과 방법은 획일적이 않으며,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오미가 이방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절망감으로 뒤덮여져 있을 때, 죽은 남편과 죽은 두 아들을 살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보잘것없는 이방 여인 룻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나오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룻4:15)“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야곱은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해 20년 동안 품삯을 받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은 야곱이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고 많은 재물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모세 어머니, 요게벳은 자신의 아들, 모세에게 젖을 먹였음에도 바로의 공주로부터 삯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자기 자식에게 젖을 먹였다고 돈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반대로, 요나는 정상적인 배 삯을 지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지만, 여행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도중하차당했습니다. 그렇다고 뱃삯을 환불도 받지도 못했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 어머니가 새벽기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도록 내 버려두시는가?” “하나님은 믿음이 좋은 집사님의 사업이 망하도록 내 버려두시는가?”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거나 섭섭한 감정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이 주님에게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했을 때,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나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갈 때, 때로 사막과 매임, 그리고 질병과 풍랑으로 환란과 고통을 만나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고난당할 때에 해답은 기도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평안한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잠3: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리라” 우리의 생각에는 돌아가는 길 같고, 잘못된 길 같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안전한 길로, 가장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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