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위로(격려)가 꼭 필요한 사람들

성경 : 사도행전 4 : 32-37 / 제목 : 위로(격려)가 꼭 필요한 사람들 / 2019. 2.10

잡 코리아가 사람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이 무엇인가?”란 질문에 “아직 희망은 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라고 보도 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있습니다. 직장이 우리를 내몰 때가 있으며, 건강이 무너질 때가 있으며, 경쟁 사회 속에서 떠밀려 낙망할 때가 있습니다. 위로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오늘은 “위로가 꼭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겠습니다.

  1.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하다.

예루살렘 교회는(4:4)“남자만 오천 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누군가에 의해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형편을 알고 있던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여러 물건들과 돈을 사도들 앞에 가지고 왔습니다. (4: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여기 “필요”란 “도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생존을 위해 대표적으로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주님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1인칭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일용할 양식은 나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필요하다.”는 교훈입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수자가 남자만 5천명이었는데, 대부분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온 교회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오늘 교회에 주는 메시지는, 교회는 적어도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일용할 약식”에 대해서 깊은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누구보다 바나바가 이 일에 앞장섰는데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행4:36)“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위로의 아들)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지만 사도들이 “바나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바나바”란 “격려자, 위로자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바나바는 사도도 아니며,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선출했을 때 피택 되지도 않았고, 어떤 직분도 없었지만 그의 이름과 같이 소외되고 어려운 성도를 섬기고 위로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여기 위로용기를 북돋우어주다.”란 뜻입니다.

 

제가 지난 10월에 한국 방문 중에 인천, 신정교회 이규현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규현 목사님은 제가 어린 시절, 시골 모 교회 출신으로 얼마간 함께 교회 생활을 했는데, 제가 중학교 때, 그 목사님은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중학교도 다니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한참 늦게 중학교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너무 가난하여 주일날 교회에서 헌금도 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가 용돈 얼마를 건네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50년도 넘게 된 이야기를 꺼내면서 저를 교회 앞에 소개하였습니다.

 

“오늘 설교할 목사님은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분으로 제가 존경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주일날 돈이 없을 헌금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제가 처음으로 목사님에게 많은 돈을 받아 헌금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받은 은혜를 잊을 수 없으며 참 고마우신 분이십니다. 저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은 사람은 50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5병 2어”사건은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제자들은 배고픈 무리들을 향해 (막6:36)“무리를 보내어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했지만, 주님은(눅9:16)“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눅9:17)“먹고 다 배불렀더라.” 주님은 배고픈 자들을 먹이심으로 백성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배고픈 사람 입장에서 고난당한 자의 입장에서, 실패한 자의 처지에서, 이해하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없을 것입니다. 존 맥스웰 목사님은 “격려는 영혼의 산소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작은 일에도 서로 격려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곤궁에 처한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하다.

위대한 바울이 있기까지 바나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섰고,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잔혹하게 박해하던 중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비롯 그를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9: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주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이때 바나바가 사울을 적극 변호하였습니다. (행9: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 하니라.” 바나바는 사울의 회심을 보증하였을 뿐 아니라 변호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사울을 찾아가 함께 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행11:25-26)“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바나바의 위대한 점은 곤궁에 처한 사울을 변호하며, 그와 함께 1년 동안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함께 선교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욥이 모든 자녀와 재산을 잃고 몸에 종기가 나 재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세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욥2:13)“밤낮 칠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니!” 욥의 친구들은 무슨 말로 위로할 수가 없어 7일 동안 옆에 있었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당한 자에게 값싼 동정심이나 변명보다는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롬12:15)“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였습니다. 가족 중 한 한사람이 아프면 온 식구가 걱정을 하거나 한 사람이 기쁜 일을 당하면 온가족이 즐거워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성도 가운데 한 가족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같이 걱정이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함께 즐거워 할 줄도 알아야 되고, 함께 울 줄도 알아야 합니다. 길 가다가 성도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바쁘더라도 서로 인사하고 반가워해야 합니다. 등이라도 두르려 주어야 합니다. 식사 때에 만났다면 식사를 했느냐고 물어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식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을 멀뚱멀뚱 져다보고 그냥 지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타인이 즐거워 할 때 함께 즐거워하지 못하고, 타인이 울 때 함께 울 줄 모르면 내 믿음이 식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바울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딤후4:10-11)“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우리가 잊지 못하고 가슴 뭉클하고 감동을 준 사람은 내가 곤궁해 처해 있을 때 손을 잡아준 사람, 함께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살아온 부부가 소중하며, 부모 형제가 소중하며, 함께 믿음의 생활해 온 성도들이 소중합니다. 여러분! 적어도 우리는 “당신과 나는 상관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곤궁에 처한 사람, 슬픔에 처한 사람에 대해 (살전4: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주안에서 서로 위로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1. 실수한 사람에게위로가 필요하다.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제 1차 전도여행 때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도중에 선교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후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마가가 다시 합류하여 가기를 원했으나 바울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바나바는 바울과 달리 실수한 마가를 용납하고 다시 기회를 주어 함께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바나바는 실패한 마가를 격려함으로 훗날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었고, 바울이 한 때, 무익하다고 생각했던 마가가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딤후4:11)“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나바는 결단력이 부족하고, 사명감이 없었던 마가를 다듬어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학교에 간다고 해놓고 극장 구경을 간 아들에게 아빠는 밥을 주지 말고, 매를 먼저 맞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엄마는 밥을 먼저 먹인 다음, 매를 때리든지 용서하던지 하자고 했지만,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이들 앞에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했다고 밥도 안 먹고 집을 나가버립니다. 아버지가 밥을 먹지 않고 나가니까 온 가족이 밥을 먹을 수 없고, 잠을 잘 수 없고, 그 다음날까지 온 가족이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친 베드로를 찾아가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잘 때부터 알아봤다. 계집아이 앞에서도 나를 모른다고 했지?”,“지금 여기에 왜 왔어!” 이렇게 말하지 않고 “아침 먹었어, 아침 같이 먹자”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심각하게 비뚤어져 심각한 문제도 “밥 먹었어!, 같이 밥 먹자!”라는 말 한마디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틀리지도 맞지도 않는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고 다투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사를 했는데, 저 사람은 나에게 인사하지 않는다.” 이런 사소한 것으로 이 교회는 사랑이 없다. 라고 생각합니다. 위로는 실수하고, 깨진 것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틴 우드”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먼 순례길을 마치고 돌아온 순례자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순례길에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뜨거운 태양, 갈증과 목마름이었습니까?” 순례자는 아닙니다. “가파른 언덕길이었습니까?”, “길을 잃을 때 입니까?”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내 신발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모래였습니다.” 인간관계를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것은 큰 바위가 아니라, 신발 속에 모래와 같이 작고 조그마한 것들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라고 기도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바나바는 특별히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사람과 곤궁에 처한 사람과 그리고 실수한 사람에 위로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또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우는 사역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