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마태복음 5:13 / 골로새서 4 : 6 / 제목 : 소금이 어디에 필요합니까? /2019. 2.24
소금이 귀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소금은 부와 힘의 상징이었으며, 원래 소금이란 “소에 금을 실은 것”이라 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으며, 과거 아프리카에서는 소금은 금과 동일한 값으로 거래되었고, 노예의 발 크기에 해당하는 소금으로 노예 한사람을 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소금은 생명과 같은 것으로, 소금보다 우선되는 것이 없습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소금이 필요 없었던 적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오늘은 소금이 필요한 곳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필요한 세 곳이 어디인가를 생각하여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 우리가 먹는 음식에 소금이 필요합니다.
(욥6:6)“소금을 치지 않고 싱거운 것을 먹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소금은 찬밥 신세가 되었고, 하찮은 물건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식당에 가면 사람들이 “아주머니 싱겁게 좀 해주세요!”라고 주문을 합니다. 겨울에 눈이 오면 길바닥에 마구 뿌릴 정도로 싸구려 취급을 받는가 하면, 소금광산은 핵폐기물 저장고로 바뀌고 있는 실정입니다.
요즘은 소금이 설탕과 함께 건강을 해치는 대표적인 원흉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마저 하루 6g 이하로 섭취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소금에 대한 대우가 말이 아니며, 너무 흔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합니까? 지금 한국기독교,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밟히고 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불교, 천주교보다 봉사, 구제, 선교를 많이 하고도 욕은 더 많이 먹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소금이 너무 흔해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비록 우리 그리스도인이 잘못하여 욕을 먹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 없이 욕을 먹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세상에서 욕을 얻어먹고 있지만 세상에 없어서 안 될 존재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금의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의 조화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맛은 5가지로, 단맛, 쓴맛, 매운맛, 신맛 그리고 짠맛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다른 4가지 맛을 넣어 요리를 해도 소금을 넣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소금은 단순히 짠맛만 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소금은 본성이 따뜻하고 맛이 짜며, 독이 없다. 소금은 독기를 다스리고 증오와 심통, 악창과 광란을 고치고 오미(五味)를 돕는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오미를 돕는다.” 소금은 단순히 짠맛을 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맛과 함께 더 좋은 맛을 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운탕에 매운맛, 쓴맛, 신맛, 단맛을 넣어도 어울리지 않다가 소금을 넣게 되면, 모든 맛들이 함께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즉 소금은 다른 맛과 어울려 다른 맛을 변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막9:50)“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화목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분열과 갈등으로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분열된 우리를 하나 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사람들은 끊임없이 분열을 일삼고 있습니다.
(롬12:16)“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체”한다는 것은 아는 척, 가진 척, 잘난 체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높고, 낮은 사람, 귀하고 천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된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음식을 만들고, 식사할 때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는 화목케 하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엡4: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 우리의 대화 속에 소금이 필요합니다.
(골4:6)“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직역을 하면 “우리의 말 속에 소금을 넣어라.”는 뜻이 됩니다. 배추를 가지고 김치를 담그려고 하면 가장 먼저 소금으로 숨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배추는 5번 죽어야 김치가 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 말 속에 소금을 넣어라.”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 대부분 상했거나, 억새, 타인에게 상처를 줌으로 숨을 죽여라.”는 의미입니다. (엡4:29)“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은혜를 끼치게 하라.”
“더러운 말”이란 “섞었다.”라는 뜻으로 생선이나 과일이 섞었을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부패하고 상한 음식을 먹으면 설사와 구토를 일으키듯 우리가 과격하고 거짓 된 말을 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 말이 상하고 섞었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애기 건강을 위해 약국에 갔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여보 애들에게 비타민 A가 좋아요 B, C가 좋아!” 하자 아내는 “아무거나 하세요! 아이가 아직 글을 모르잖아요!”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이고 무식하긴 당신하고 대화가 안 돼?” 이것은 마음을 상하게 하는 썩은 말입니다.
반면, “여보 그게 아니고, 비타민은 우리 인체에 꼭 필요한 영양분을 말하는데, 영양분을 종류대로 구분해 A, B, C 라는 기호를 붙인 것인데, 비타민 A를 먹으면 눈에 좋으며, 비타민 B는 뇌의 활성을 돕고, 비타민 C는 피로회복제야” 이게 덕을 세우는 말, 말 속에 소금을 넣은 말입니다.
“여보 오늘 수고했어! 식사 고마워!”이런 말은 듣기만 해도 닭살이 돋고, 왠지 솔직하지 못한 것 같고,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뚝뚝한 표정과 말을 가지고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을 때에 소금을 두고 약속하였습니다. 이것을 “소금언약”이라 부르는데, 약속을 변치 않겠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말을 조심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성경은 말을 조심해야 할 사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딤전3:8)“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또 있습니다. (딤전3:11)“여자들도 단정하고 참소(비방, 험담)하지 말며”
“혀는 뼈가 없으나 뼈를 부러뜨린다.”는 속담과 같이, 상처를 주는 말 한마디가 평생에 아픔을 주기도 하지만,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탈무드에 “말은 손이 없으되 손과 같은 일을 한다.”는 교훈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계신 주님의 거룩한 모습 앞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이 바로 “자신의 부정한 입술”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6:5)“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자로다” 우리는 타인에게 실수한 것이 있으면, 잘못을 시인 할 수 있어야 하며, 거짓을 말하였을 때는 잘못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제가 소금에 절인 말 다섯 가지를 골라 보았습니다. 아주 숙성되어 누가 언제 어느 때, 아침에도 밤에도, 가족에게 친구에게 누구에게 사용해도 소화가 될 수 있는 말입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감사해요”, “사랑해요”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말을 사용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소금이 필요합니다.
지금도 그리스도도인들이 그야말로 소금과 같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습니다. 미국백악관과 청와대, 국회, 나사 본부에서부터 아마존과 북한지하교회에 이르기까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세계도처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이곳 마드리드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곳에서, 직장과 학교, 사업장,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공동체에서 사람을 살리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세상 가운데서 소금과 같이 사람을 살리는 시명을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소금의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소금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단 맛을 내는 물질은 설탕 외에 과일에도 많습니다. 쓴맛도 매실이나 레몬 등 많은 과일에서 쓴맛을 냅니다. 그런데 짠맛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소금뿐입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란 말씀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을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란 뜻입니다. 교회가,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누가 대신해 줄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판검사나 정치가가 세상을 정의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근원적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면 세상에 소망을 줄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예수그리스도를 대신 할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행4: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수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다.”라는 말 때문입니다. 불교의 스님도 천주교 신부님도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구원이 있다고 하는데, 기독교 목사들만 자기들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를 독선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그럴 수 있겠다. 왜 기분 나빠하는지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거짓은 거짓에 대해 수용할 수 있지만 진리는 거짓에 대해 수용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14:6)“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소금인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맛을 내는 방법은 딱 한가지뿐입니다. 녹아 없어지는 방법뿐입니다. 소금은 자신의 형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맛도 낼 수 없습니다. 소금이 맛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녹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희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맛을 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을 때 사람들에게 밟힐 수밖에 없듯이, 그리스도인들 또한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우리의 믿음이 변질되어 본분을 감당하지 못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소금과 같이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리고, 맛을 내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