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맏아들 안에 있는 비교의식

성경 : 누가복음 15 : 25-32

제목 : 맏아들 안에 있는 비교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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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두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후 탕자의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15:1-2)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맏아들로 비유한 반면, 세리와 창기를 둘째 아들에 비유했습니다.

 

비유의 내용과 같이 둘째 아들로 비유된 세리와 창기,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기에 주님께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맏아들로 비유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며 비난하고 정죄하였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충성하고 있는 성도들이 한때 세상에서 비난받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우리가 맏아들과 같이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비난하기보다 사랑으로 받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맏아들 안에 있는 비교의식”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맏아들 안에 있는 비교의식이 피해의식을 갖게 했다.

탕자의 속편에 해당하는 본문은 둘째 아들이 집에 돌아와 축제가 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잔치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습니다. 잔치 소식을 들은 맏아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29절)“네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들과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아버지를 위해 고생한 나에게는 염소새끼라도 내주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에게는 송아지를 잡아?” 맏아들은 동생과 비교함으로 화가 났고 아버지와 동생을 미워하며 적대시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서로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장남, 장녀, 맏며느리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희생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수고와 희생이 피해의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맏며느리들이 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김씨 집안에 시집왔을 때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그런 가운데서 시부모님 모시고, 아래로 여섯 시동생과 시누이들까지 공부시키며 결혼까지 시켰는데 이제 와서 시집식구들이 나에게 무엇이라 하는지 아세요? “맏며느리가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 아니에요! 참으로 기가 막혀서!” 그 다음 대화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특히 동생들이 형보다 잘 살고 있으면서, 집안과 부모에 대해 소극적이고, 인색할 때 피해의식은 절정에 달합니다. 맏아들과 맏며느리는 “왜 우리만 부모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라는 피해 의식을 갖기 쉽습니다.

 

여러분! 누가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갖도록 합니까? (약4:14-15)“시기와 다툼은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 비교의식과 시기심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이지 성령이 주는 마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교의식이 아니라 “동역자 의식”입니다.

 

교회 안에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 부족한 사람이 함께 예배하며 섬기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와 은사를 타인의 은사를 비교하여 시기하는 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우리는 경쟁자가 아닌 동역자들입니다.

(히10:24)“서로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격려”란 “분발시키다.” 뜻으로, 용기와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교육학에서 “피그말리온 효과란”란 이론이 있는데, “칭찬과 격려를 하면 학습능률이 오르거나 좋아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3:17)“하늘로부터 소리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시는 자라” 하나님의 격려를 받은 주님은 광야에서 40일 금식과 시험을 무난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비교는 피해의식을 가져오지만, 격려는 분발하게 합니다. 가족끼리, 성도들이 서로 격려할 수 있길 바랍니다.

 

  1. 맏아들 안에 있는 비교의식이 증오심을 갖게 했다.

저는 어린 시절 7남매와 함께 자랐습니다. 저보다 세 살 위에 누님이 있는데, 학교에 다니면서 집안 일, 청소와 빨래 등 거의 혼자 다했습니다. 집안일을 하느라 대학에 합격했음에도 대학을 가지 못했지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감정이 폭발되고 말았습니다.

 

큰 형님이 결혼하여 맏며느리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다음날 대형 세탁기 한 대를 사왔습니다. 학교에 갔다 온 누님이 집에 세탁기가 들어온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은 자식이 아니라 일꾼이었네! 나를 부려 먹으려 낳은 줄 이제 알았다.”누님은 평소 가족을 위해 일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지만, 자신과 시누이와 비교함으로 파괴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맏아들 역시 둘째 아들이 집에 없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수고한 것을 보상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행한 것을 보았을 때 맏아들은 파괴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맏아들은 자기 동생에 대해(30절)“아버지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라 했는데, “약탈자”란 뜻으로, 맏아들은 동생을 자신의 몫을 빼앗은 약탈자로 보았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온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라고 했지만, 맏아들은 잔치를 베푼 아버지와 동생 모두에게 증오심을 폭발했습니다. 비교가 파괴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형제, 자매 심지어 부부도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비교해도 괜찮은 유일한 대상은 부자지간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잘생겼네!”, “아들이 아버지보다 잘 됐네!”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증오심을 긍정적으로 사용하여 유대인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선교의 원리를 보면, 주님은 처음 12제자를 파송하실 때(마10:5)“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로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 버린 양에게로 가라.” 무슨 뜻입니까? 동족선교를 우선적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마10:14-15)“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 바울 또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복음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이방선교를 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11:14)“이는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혼자 키우는 집 아이들이 종종 밥을 잘 먹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밥을 잘 먹게 하는 방법으로, 형제들이 많은 집에 가서 밥을 함께 먹게 한다면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믿음 생활을 마라톤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잘 믿었다고 해서 내가 잘 믿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비록 못 믿었다 해도 내가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일이 힘들고, 고독한 것은 마라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출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이 열심을 내 보세요! 그러면 먼저 믿은 분들이 분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처음 믿는 분들이나, 금년도 직분을 받으신 분들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초신자들이 열심을 내면 교회는 부흥됩니다. 주님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일에 분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맏아들 안에 있는 비교의식이 공로의식을 갖게 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당연한 일임에도 “공로의식”을 가졌습니다. (29절)“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직장인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한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6:1)“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옳다.”란 “마땅하다.”“당연하다.”란 뜻입니다.

 

오늘날 당연한 일을 가지고 호들갑을 뜨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 15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정부가 농촌 장려차원에서 4대가 함께 농사를 짓는 가정에 상금을 주기로 하고 조사를 했는데, 전국에서 겨우 2가정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본가가 포함되었습니다.

 

저의 부친이 생존해 계셨을 때, 저희 본가는 4대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이유로 상금을 무려 2억이나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보았을 때 손자가 잘난 척 해보였든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잘해도 내가 없으면 어떻게 상을 받을 수 있었겠나?”

 

마태복음 20장 포도원품꾼 비유에서 품꾼들이 약속대로 품삯을 받았음에도 주인을 원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했는데 똑같이 취급하다니!” 라는 공로의식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마20:13)“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네 것을 가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내가 수고한 것에 대해 알아주지 않을 때 섭섭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보다 더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헌신한 것은 공로가 아니며 은혜입니다. 내가 더 많이 충성한 것은 자랑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눅17:10)“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하라”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공로의식이 아니라 빚진 자 의식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빚을 졌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피 흘려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기업을 잇게 될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고전4:3-4)“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내가 어떤 일을 한 것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을 보류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한 것이 잘 한 일인지? 아니면 못한 일인지 나도 모르며, 칭찬과 책망은 하나님께 맡기겠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며 선언입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도 맏아들이 가지고 있었던 “피해의식” “증오심” 그리고 “공로의식”이 없는가? 살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형제와 자매끼리, 이웃끼리,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성도와 성도끼리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우월의식, 증오심과 공로의식”을 극복하여, 서로 용납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