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에 새로운 기준이 된 복음

성경 : 마태복음 9 : 9-13, 16-17

제목 : 우리의 삶에 새로운 기준이 된 복음 / 2019. 1.27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세리 마태와 함께 식사하느냐?”하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당시 두 가지 생활풍속, 옷과 가죽부대 비유를 통해 답변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삶에 새로운 기준이 된 복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새로운 기준이 된 복음은 정죄가 아닌 용납이다.

16-17절,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는 구약율법이 신약의 복음으로 기준이 바뀐 것을 비유한 것으로, 구약에서 율법은 사람을 정죄했지만, 신약에서 복음은 정죄가 아닌 용납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기준으로 세리마태를 “죄인”이라고 비난하였지만, 주님은 복음의 기준으로 세리 마태를 용납해 주셨습니다.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레위”라고 기록한 반면, 마태복음은 “마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명은 “레위”로, 그가 제자로 부름을 받은 후부터 마태로 불렸습니다. “레위”란 이름은 구약 야곱의 12아들 중 레위에서 시작되어, 레위지파가 나왔고, 레위지파에서 제사장이 배출되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레위”는 마가복음(2:14)“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알패오”는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글로바”와 동일 인물이기도합니다. “마태”와 그의 아버지는 알패오는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이지만, 한참 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가버나움 세관에서 세리로 일했으며, 당시 세리들은 정한 세금보다 많이 세금을 거두어, 부당한 이득을 취한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세리에게“정한 세 외 징수치 말라” 했습니다. 마태가 세금을 갈취했다는 증거가 없지만, 로마를 위해 일했다는 것 때문에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세리는 “죄인과 심지어 창기” 취급을 받았고, 혐오대상이 되었습니다.

 

(11절)“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여기 “죄인”은 바리새인들이 정해 놓은 기준을 말하며, 그들이 정해 놓은 규칙과 다를 때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13절)“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이 말씀하신 “죄인”과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한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마태를 죄인이라고 정죄하면서 자신들은 의인으로” 생각했지만, 주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지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라고 말씀하시며, 마태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그와 함께 식사까지 하였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규칙을 하나를 제정해 주셨는데 (마7:1)“누구든지 비판(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장, 마르다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고친 일로 잔치를 베풀며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를 본 가룟유다는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느냐?”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룟유다에게 그를 가만 두어라”하였습니다. 가룟유다의 잘못은 마리아의 선행을 비판하기 위해서 가난한 자들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라는 일본 여류 작가가 지은 “로마인의 이야기”라는 책에서 “로마의 강점은 바로 관용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1,000년 이상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가 정복한 나라들에 대해 자국민의 왕을 선출 할 정도로 관용적이었기에 오랜 기간 동안 강력한 제국으로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받아주기 보다 정죄하기 바쁩니다. 만약 어떤 분이 교회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부인에게 가서 네 남편이 담배를 피우더라, 소문을 내야 합니까?” 아니면 “아직 담배를 끊지 못했군요!”, “저도 많이 힘들었는데 지난달에 겨우 끊었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입니다. 나이도, 습관도, 성장배경도, 환경도 다릅니다. 그러기에 비난이 아닌 다른 것을 수용하고, 받을 수 있는 열린 마음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신 기준은 비난이 아닌 용납입니다.

 

  1. 새로운 기준이 된 복음만이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

주님은 (12절)“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하시면서 마태를 “병자”로 보았습니다. 주님은 마태를 고치기 위해 마태의 집을 방문하셨고, 마태를 고쳐 주셨습니다.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12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자신이 열두 제자의 이름을 기록할 때, 마태란 이름 앞에 (마10:3)“세리 마태”라고 직업을 함께 적었습니다. “창기와 죄인” 취급을 받는 수치 서러운 이름을 숨기지 않고 의도적으로 기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는 과거 죄인 취급받았지만,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았고 병든자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고침 받아 주님의 제자가 된 사실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우리의 과거까지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지난날 허물과 실수까지 치료해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때론 마음의 평안과 병을 고쳐주기도 하지만 할 수 없는 것은 “죄용서”입니다. (사43:25)“네 죄를 기억하지 하리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가장 나쁜 교육 중 하나는 자녀들이 초등학교 때 잘 못한 것, 중학교 때 잘못한 것을 계속 기억하여 주눅 들게 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학교에 안가고 오락실에 가더니 또 고등학교 때도 그러다니!” 사람은 과거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 받은 확신을 갖고 새롭게 시작할 때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어떤 수도원에 전직창녀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전직이 창녀라는 직업 때문에 동료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원장이 “수도사들에게 지난 과거가 있었더라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음으로 허물을 덮어 주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원장은 수도사들을 강가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원장은 수도사들에게 강가에 흩어져 있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오라고 했고, 전직 창녀였던 수도사에게는 눈에 잘 보이는 큰 돌멩이 하나를 주워오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원장은 모든 수도사들에게 자신들이 주워온 돌멩이들을 본래 있던 장소에 다시 갖다놓으라고 하자, 수도사들은 한 사람도 자신이 주워온 돌멩이를 제 자리에 갖다 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전직 창녀였던 수도사만이 본래에 있던 장소에 돌멩이를 갖다 놓았습니다.

 

원장은 모든 수도사들을 불러 놓고 “지금 여러분들 여러 돌멩이를 어디에서 가지고 온 것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크고 작은 잘못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 타인이 저지른 한 가지 죄는 오래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사람은 오히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원은 불치의 환자,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왔다고 병원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는데, 오늘날 교회는 전과가 있는 사람, 사기 친 사람이 교회 나오면 교회 이미지가 좋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처럼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병원이 좋은 병원입니까? 각종 병자들이 찾아오는 곳이 좋은 병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누구나 와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 이름 있는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 중산층만 모이는 교회는 좋은 교회일 수 없습니다.

 

지금도 마태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께서 “내가 건강한 자가 아닌 병든 자를 부르러 왔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이 외면한 자들을 용납하여 치료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새로운 기준이 된 복음은 제사가 아닌 긍휼이다.

13절의 말씀은 마태가 (호6:6)“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호세아에서 인용했습니다. 인애라고 할 때, 윌리엄 돈이 작곡하고 크로스비가 작시한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라는 찬송을 떠 올리게 됩니다. 이 찬송은 많은 성도들이 좋아하고 영감 넘치는 찬송입니다.

 

“인애”는 “신실하고 변함이 없는 사랑을 말하는데, 영어찬송가는 “O gentle Saviour,세이비어”(오 멋있는 주님)이라 번역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gentle men” 이라는 의미와 다릅니다. 남자에게 “gentle men”은 최고의 찬사로, 최고의 찬사를 받는 “gentle men”이 되려면 “그 마음이 신실하고 변함없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6,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하여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예수님은 반대로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백성들 또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무리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떡과 고기를 먹이셨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유월절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떡을 얻어먹는 편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 제사종교가 영향력을 잃어버려, 떡보다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종교는 썩어 냄새가 났습니다.

 

유대교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집에서 기른 제물을 성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허락해 주지 않고, 성전 안에서 파는 양과 염소와 짐승을 사서 제사하도록 많은 이윤을 남기고 팔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제사는 형식적이고, 이기적인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과거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이 자기 나라 화폐를 사용하다가 유로화로 바꾸었습니다. 처음 화폐가 바뀌었을 때 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불편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복음이라는 기준을 주셨음에도 여전히 구약율법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주셨습니다. 정죄가 아닌 용납입니다. 복음만이 사람을 고칠 수 있으며, 그리고 제사가 아닌 긍휼만이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13: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