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여호수아 24 :14-22
제목 : 인생은 나의 선택이다. 2019. 1. 6
우리가 돌잔치를 할 때, 보통 갓난아이 앞에 돈과 연필과 실 꾸러미를 놓은 후 그중에 하나를 잡으라고 합니다. 아이가 돈을 잡으면 앞으로 부자 될 것이고, 연필을 잡으면 공부를 잘 할 것이고 실을 잡으면 건강하게 장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박수치며 좋아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어떤 것을 좋아 하는 가를 알기 위해 한 것이겠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돌때 아이가 무엇을 잡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금년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여 축복을 받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은 “인생은 나의 선택이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하나님과 우상, 나의 선택이다.
여호수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아닌 여러 신들을 섬겼습니다. (2절)유프라테스 강 저편 갈대아우르에서 “일월성신과 수호신”을 섬겼고, (14절)“애굽에서 섬기던 신”금송아지, 피, 개구리 등 곤충과 짐승들을 섬겼습니다. (15절)“아모리 사람들이 섬기던 음란의 신”을 섬겼습니다.
이런 가운데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14-15절)“다른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신들 중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결국 (24절)“백성이 여호수아에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겠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보통 한국에서는 집을 짓고 난 다음이나 배가 출항을 하거나 영화를 개봉할 때 고사를 지냅니다. 돼지머리와 떡, 마른 북어를 차려 놓고, 막걸리를 따른 후, 돼지 입에 돈을 끼워놓고는 넙죽 절을 합니다. 집안에 우환이 없고 평안하도록, 배가 안전사고 없이 만선을 하고 돌아오도록 그리고 영화 촬영 도중에 사고 나지 않고 대박이 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의지할 것을 찾고 우상을 만듭니다. 좁은 의미로 우상이란 사람이 만든 신상을 말하며, 넓은 의미로 우상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여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교훈에 민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형상을 섬기거나 절하고 있지 않으며,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암자에 세워진 불상 앞에 절을 하거나, 콤포스텔라 야고보 성당을 방문하여 야고보 무덤을 숭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상숭배는 단순히 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지배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원하는 성공과 돈과 권력, 욕망과 명예가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골3:5)“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을 만들어 내는 곳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음에도 타락한 인간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신을 찾고, 만들며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에 대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출20:5-6)“우상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갚고,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않으면 세상의 것들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 못하도록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축복과 저주, 나의 선택이다.
사람들이 복이라고 할 때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수입이 좀 더 많았으면” “좀 더 좋은 직장이나 직업을 가졌다면” “이것저것이 됐으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떠올리면서 복 있는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일거야” 생각하지만 그 사람 역시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신명기 28장을 “축복과 저주 장”이라 부릅니다. 1절부터 14절에서 축복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2절)“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이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저주에 대한 말씀은 15절부터 68절까지 쉰 네 절입니다. 아마도 15절부터 68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읽고 싶지 않는 부분일 것입니다. 저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주의 말씀이 축복의 말씀보다 약 4배정도가 많습니다. 이것은 축복의 길보다 저주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동물에게 없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동물은 자유의지가 아닌 본능에 의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로버트가 아닌 자유의지에 따라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화와에게(창2: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선악과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화와의 선택으로, 자신은 물론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고, 죄로 인해 사망이 왔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고,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가룟 유다는 은30을 성소에 던지곤 목을 매달아 죽었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여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미국 킹스턴 법대를 졸업한 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이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잘 몰라 방황하며 도박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을 때 한 친구는 우리가 술집에 가기 전, 교회에 먼저 한번만 들어 가보자고 제안했고, 다른 한 친구는 나는 도박장에 가겠다고 하면서 서로 다투다가 헤어졌습니다.
교회로 간 친구는 이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정치인이 되었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송과 신문은 온통 그에 대한 기사로 꽉 찼습니다. 이 때 한 늙은 죄수가 감옥에서 신문을 보면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 친구가 30년 전 나랑 교회 가자고 싸우던 친구였는데 결국 그는 대통령이 되었는데, 나는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구나!” 그 대통령이 바로 “클리블랜드 대통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은 한 여인(요한복음에만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 어떤 제자들은 “어찌하여 허비 하느냐”고 했고, 유다는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계산했습니다. 향유의 값을 계산한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헌신을 숫자로 계산 했다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
(살전5: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우리 인생은 어떤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현대인의 약점 중 하나는 지식은 많으나 용기가 없고, 힘은 있으나 결단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축복받는 길을 선택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생명과 멸망, 나의 선택이다.
선택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를 택하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한 여자와 결혼했다면 모든 여자를 포기해야 하며, 한 남자와 결혼 했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남자를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섬기기로 했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생명과 멸망의 두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면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주님께서도 두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마7:13,14)“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광대하여 그 길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협소하여 그 길을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
인생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선택의 요구 앞에 직면합니다. 5분을 더 누워 있을 것인가? 교회에 갈 것인가?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에서부터 어느 대학을 갈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선택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선택과 포기는 한 번이 아닌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다음 기회에, 여유가 있을 때에 결정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내일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와 가치는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남자로 태어났는가? 여자로 태어났는가? 큰 차이입니다. 결혼을 했느냐, 안했느냐, 스페인에 사느냐? 한국에 사느냐 차이도 클 수가 있습니다. 지위가 높고 낮음, 소유의 유무의 차이도 엄청나게 큽니다. 그런데 이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인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않느냐?”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제 인생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것보다 더 중요한 선택은 없습니다. 제 인생에 최고의 선택 후회 없는 선택은 예수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입니다. 제가 가진 많은 축복 중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축복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축복이 없습니다.
복된 사람은 유혹도 없고 아무런 걱정도 없는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1:1)“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도 여전히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도 악인에게 속임을 당하며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이 활개 치는 곳에서 손해를 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길을 따르지 않는 자이며,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는 자이며, 교만한 자들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상, 축복과 저주 그리고 영생과 멸망은 선택함으로 주어집니다. (잠27:1)“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이런 이유로 여호수아는 “오늘, 지금 결단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2019년, 새해에는 하나님과 축복, 그리고 영생을 선택하므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한해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