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성경 : 창세기 29:13-20 / 제목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2018.10.14

한국에서 “대책 없는 사람” 시리즈가 있습니다. “몽고반점”을 중국 음식점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L.A와 Los Angeles가 다르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며, 으악새가 새의 이름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으악새는 “억새”라고 하는 풀의 이름입니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몸에도 전염된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으며, 사랑을 받기만하고 주지 않는 사람이 대책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야곱을 통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삶이 두렵지 않다.

(1절)“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동방은 지금의“이라크”로 밧단아람은 브엘세바에서 약 640Km로 하루에 약 20Km 걷는다면 한 달이 넘게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야곱은 한 달 정도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 이르자 마침 목자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려고 우물에 모였는데, 라반의 딸 라헬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딸 라헬을 보자 첫눈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10절)“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야곱은 라헬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자 라헬을 도와주었습니다. 목자들은 양떼에게 풀을 먹인 후 물을 먹였습니다. 우물은 하나인데 목자들과 양떼들이 아주 많음으로 많은 양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는 우물에 큰 돌로 된 뚜껑을 덮었다가 양떼에게 물을 먹일 때는 뚜껑을 열어 물을 먹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꽃을 좋아하면, 함께 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수영을 좋아하면 함께 좋아하게 됩니다.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데 직업 때문에 결혼할 수 없어!” “그 사람은 사랑하지만 그 사람이 하는 일은 싫어”라고 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돌 뚜껑은 (2)“큰 돌이라 하였습니다. 야곱은 큰 돌 뚜껑을 혼자서 번쩍 들어 올린 후 모든 양떼들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보통은 몇 사람들이 힘을 합쳐 들어야만 하는 무거운 돌 뚜껑을 야곱은 혼자서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라헬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거운 돌을 들게 할 뿐 아니라,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의 힘은 위기를 만날 때 더욱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불이 났을 때는 불과 물속으로 뛰어 들어 자식을 구해내는 어머니를 봅니다. 의사들은 “인간이 쓸 수 있는 힘은 겨우 20%밖에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게 되면 그 힘은 5배 이상 크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에 “열두 가지 강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돌은 강하다. 돌은 쇠에 깎인다. 쇠는 불에 녹는다. 불은 물로 끌 수 있다…죽음이 최고로 강하다.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죽음보다 강한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사랑에 대해 실망과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실망하여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자식 키워 아무 소용없다.”말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요일4:7)“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이것은 “사랑은 나에게 없다.”라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해서 사용하는 것처럼 사랑도 충전을 해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충전 받을 수 있습니까?

(요일4:12)“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나에게 사랑을 계속 머물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을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것은 상대의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일4: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 쫓나니”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큰 축복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길 바랍니다.

 

  1.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진다.

(11절)“그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야곱이 양떼들에게 물을 다 먹인 후 라헬에게 달려가 입을 맞추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왜 울었습니까?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수백 킬로를 도망 왔습니다. 정처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혈육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감격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이국땅에서 누군가보고 싶어서, 낯선 땅에서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이웃과 친구를 만남으로 감사하여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사랑은 사람을 감격하게 만들고 감사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독일 교회당 종탑을 보면 십자가 대신 닭을 조각한 종탑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 닭이라 부르는데,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닭 울음소리를 듣고 회개한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저주하고 배반한 죄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지난날의 고통과 아픔에서 치유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만이 웃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동물도 눈물을 흘리지만 눈을 보호하는 목적뿐입니다. 눈물은 분명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오는 것이지만, 또한 눈물은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하게 합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심한 통증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은 아픔의 눈물이 아니라, 아이를 낳은 기쁨, 감사의 눈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가치가 있습니까? 아이가 운다고 부서진 장난감이 고쳐지며, 부모가 죽은 자식을 위해 운다고 해서 살아서 돌아옵니까?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웁니까?

 

그래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눈물이 인간의 약함과 두려움을 드러내는 표시라”고 했고,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눈물은 하찮은 것”이라고 했고, 화학자들은 “눈물은 염화나트륨과 칼슘과 다른 화학 원소들의 용액”이라 했지만, 야곱이 흘린 눈물은 “환난 중 위로와 치유의 눈물”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얼굴을 벽을 향해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 “여호와께서 네 눈물의 기도를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눈물을 보시고 고쳐 주십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많이 우셨습니다.(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이라” 주님이 죄인을 위해 심한 통곡과 기도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흘린 눈물은 비극적인 눈물이 아닌 죄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감사와 소망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되는 날이 있습니다. (계21: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이것은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눈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원히 울지 않는 그 날을 위해 지금은 울어야 하고, 우는 눈물을 영혼을 살리고 치유하는 능력이 됩니다. (시126:5-6)“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고난을 참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다.

(18절)“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라반이 야곱에게 일한 것만큼 임금을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그는 아무 보수 없이 7년을 일하겠다고 했습니다.

 

(20절)“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며칠같이 여겼더라.” 사랑은 고난이 문제되지 않으며, 시간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야곱을 보면서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변질되었는가를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사랑” 만큼 많이 사용하는 말도, “사랑”만큼 많이 다룬 주제도 없습니다. 세상에 통용되고 있는 사랑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조건부적 사랑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해주면 나도 너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사랑 중 하나로, 조건이 따라 주지 않으면 깨지는 사랑입니다.

 

둘째, “때문에 사랑입니다. “당신이 멋있기 때문에 사랑 한다.”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에 사랑한다.” 상황적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사랑이 끝나는 관계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변합니다. 그리고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는, 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사랑이 있다면 어떤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은 값진 것입니다. 살기가 힘들다고 느끼는 것, 삶이 귀찮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사랑의 식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만은 떠나지 말아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 인생이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으며, 역경 가운데서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동안에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인생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아픔과 고통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고난을 참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최상의 것으로 선택한 단어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시작된 곳이 십자가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4:10)“사랑의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겐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아만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 서로 사랑함으로 회복된 삶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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