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쟁, 30년 전쟁, 7년 전쟁
영국과 프랑스가 왕위 계승권으로 시작된 100년 전쟁은 영국이 유럽대륙에서 발판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종교개혁이후 신, 구교의 종교적인 갈등으로 촉발된 30년 전쟁은 독일의 역사를 200년 후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7년 전쟁에 대해 윈스턴 처칠은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 불렀다.
영국이 유럽에서 발판을 잃게 된, 100년 전쟁
프랑스인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독일이 아닌 영국이며, 영국인 또한 프랑스를 무척 싫어한다. 두 차례나 되는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싸웠던 우방국이 서로를 싫어하는 것이 납득이 안가지만, 두 나라의 관계는 백년전쟁에서 기인된다. “100년 전쟁”(1337-1453)은 영국과 프랑스가 휴전과 개전을 되풀이 하면서 5대에 걸쳐 116년간 프랑스 영토에서 치른 전쟁을 말한다. 전쟁의 요인은 프랑스 왕위계승 문제이지만, 실제로는 영토 문제로 영국의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1066년 영국 노르만 왕조가 성립된 후 프랑스의 영토 일부를 소유하였으나 13세기 말에는 영국 국왕이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은 프랑스의 영토를 소유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사망하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어머니가 프랑스 샤를 4세의 누이라는 점을 들어 자신이 프랑스 적통 왕위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의회는 샤를 4세 사촌인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 필리프 6세(재위 1328-1350)를 왕위 계승자로 결정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1325-1360)는 프랑스 의회 결정을 받아들여 한발 물러섰다. 그런데 1337년 왕위에 오른 필리프 6세가 기옌 지역(프랑스 남부)을 몰수하자 에드워드 3세가 반발하여 프랑스에 대한 선전포고로 100년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공교롭게도 1453년 영국이 기옌의 보르도를 상실하므로 끝이 났다.
역사학자들은 백년전쟁을 대략 세 단계로 구분한다. 에드워드 전쟁(1337-1360), 캐롤라인 전쟁, (1369-1389), 랭커스터 전쟁(1415-1453)으로 분류한다. 전쟁의 초기에는 프랑스가 참패를 당해 갈레조약으로 프랑스 영토의 1/3을 영국에게 내주었다. 중기는 두 나라의 왕이 죽음으로 전쟁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부 문제에 집중하였고, 말기에는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100년 전쟁으로 두 나라는 봉건귀족 세력이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한층 강화된 국가로 변모했다. 특히 영국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30년 장미전쟁(1455-1487)이라는 내전을 겪어야 했고 왕조도 바뀌게 되었다. 100년 전쟁으로 유럽대륙에서 발판을 잃은 영국은 또 다른 식민지 국가를 만들기 위해 대서양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독일이 200년 후퇴하게 된, 30년 전쟁
“30년 전쟁”(1618-1648)은 유럽 역사상 가장 무의미한 전쟁으로 가장 참혹했던 종교전쟁으로 불린다. 종교개혁 이후 신, 구교간의 갈등이 그치지 않았다. 1522년 독일 기사들이 트리어 대주교를 공격했던 “기사 전쟁”을 시작으로, 1531년 스위스에서 츠빙글리 개신교도와 구교도들과 치열하게 싸운 “카펠 전투” 등은 신, 구교 분쟁의 예고에 불과했다. 또한 1546년 독일 개신교 제후들이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1500-1558)의 신교 탄압정책에 항거해 황제 측과 싸운 “슈말칼덴 전쟁”, 1562년부터 1593년까지 프랑스에서 여덟 차례나 벌어진 “위그노 전쟁” 등 종교전쟁이 꼬리를 물었다. 종교개혁 이후 국지적으로 일어난 학살이나 혁명과 크고 작은 분쟁은 결국 30년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체코 프라하에서 발단이 된 30년 전쟁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독일을 중심으로 신, 구교 두 편으로 나뉘어져 직간접으로 개입하였다.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은 독일의 개신교 편에 섰고,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중심한 합스부르크 왕가가 주도한 신성 로마제국은 독일의 구교 편에 섰다.
프랑스는 구교 국가였음에도 종교적으로 유사한 스페인과 신성 로마제국 편이 아닌 정치적으로 유리한 독일 개신교 편에 섰다. 30년 전쟁에서 스페인과 스웨덴 그리고 프랑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중 스웨덴의 군대가 개신교도 편을 돕지 않았으면 구교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스웨덴의 지원으로 “국제법의 출발”이라 불리는 베스트팔렌 조약(1648)으로 전쟁이 종결될 때에 대체로 개신교회가 유리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최초의 국제전”이라 불리는 30년 전쟁은 제 1, 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인적, 물적 파괴와 손상을 가져왔다. 30년 전쟁으로 독일과 스페인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독일은 인구 30% 이상이 죽었고, 전쟁의 황폐로부터 회복하는데 약 200년이 걸렸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이 쇠퇴한 반면 프랑스 부르봉왕조가 부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페인이 입은 피해는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고, 네덜란드 또한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공인받았고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영국과 프랑스, 스웨덴도 30년 전쟁 이후 상당한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고 새로운 유럽의 강자로 부상했다. 불행 중 다행한 것은 30년 전쟁 이후 크나큰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유럽에서 누리는 종교의 자유는 희생과 피의 대가인 셈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를 잃게 된, 7년 전쟁
“7년 전쟁”(1756-1763)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게 빼앗긴 영토를 도로 찾겠다고 일으킨 전쟁을 말한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양쪽으로 갈라져 싸웠다.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은 유럽 국가들이 지배하는 전 세계 식민지 국가에서도 편이 갈라져 싸웠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격렬히 싸웠다. 원주민들마저도 전쟁에 끌어들였는데 이것을 북미에서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와 인디언이 싸웠다는 뜻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인디언을 끌어들여 영국과 싸운 전쟁이라는 뜻이다. 유럽에서는 영국의 도움을 받은 독일이 이겼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영국이 프랑스를 완전히 제압했다. 이때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빼앗은 땅이 지금의 캐나다 퀘벡 주이다. 영국은 퀘벡을 비롯한 대부분의 북미 지역을 얻었으며 대서양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면서 제 2차 대전까지 전 세계 바다를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문제는 영국이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재정 악화로 국고가 바닥났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주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이로 인해 영국은 전쟁 비용을 식민지 주민들에게 부담하는 정책을 폈다. 영국의회는 식민지 주민에 대하여 설탕조례, 인지조례 등을 통과시켜 홍차 등 모든 일용품에까지 세금을 물렸다. 지나친 세금 징수는 금세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과 폭동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반발은 1773년에 일어난 보스턴 항구의 배에 실려 있던 홍차들을 불태우고 바다에 던진 소위 “보스턴 홍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다. 이듬해 영국은 함대를 동원해 보스턴 항을 폐쇄했고, 메사추세스의 자치정부를 해산시킴과 동시에 북미식민지 정책을 “직접통치”하는 방안을 입안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보스턴 항 폐쇄와 식민지 직접 통치는 미국의 13개주가 연합하여 첫 의회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미 독립전쟁(1775-1783)의 도화선이 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7년 전쟁으로 유럽과 북미, 인도와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영국에 패하고 모든 것을 잃은 프랑스는 미 독립전쟁 때에 미국을 지원함으로 미국이 승리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영국은 비록 7년 전쟁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화 하는데 성공했지만 전쟁의 결말은 오히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다. 영국은 북미식민지를 잃게되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GDP)의 절반 이상을 잃게되었다.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을 잃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새로운 식민지 국가를 만들기 위해 전 세계에 흩어진 약소국들을 찾아 나서게 된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가 쓴 작품 “전쟁과 평화”에서 “전쟁에서 러시아를 구한 것은 영웅이 아니고 평범하고 소박한 민중들이다.”, “역사가 인물을 만든 것이지 인물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는 역사관을 피력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