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사과(Apple), 빌헬름 텔의 사과(Apple), 파리스의 사과(Apple)
유럽 문명과 역사 중에 사과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맛본 선악과(금단의 사과?), 트로이 전쟁을 불러일으킨 파리스의 황금사과, 빌헬름 텔의 사과, 뉴턴의 만유인력의 사과, 스피노자의 사과, 그리고 백설공주의 사과가 그것이다. 이런 사과들의 이야기는 기독교와 헬레니즘, 근대 청치와 과학의 발전, 그리고 문학의 발전과 함께 회자 되어 왔다. 현대에는 애플의 “벌래먹은 사과”까지 가세하여 세상을 바꾸는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과학(科學)에 눈을 뜨게 한, 뉴턴의 사과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뉴턴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또한 사과이다. 사과는 미녀를 속 빼닮았고, 색깔과 맛, 향기는 백과(百果)중 왕으로, 따라올 과일이 없다. 그러면서 질투와 매혹의 과일로, 때로 변혁과 도전의 상징으로 이해되곤 한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law of universal gravity)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에서도 사과는 과학의 발전이란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실 오랫동안 뉴턴과 사과를 결부시킨 것을 두고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주장이 엇갈릴 정도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얼마 전, 영국 왕립학회(1660년 창립)가 뉴턴의 사과나무에 대한 원문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영국 왕립학회가 공개한 문서는 뉴턴과 친분이 두터웠던 윌리엄 스터클리(William Stukeley, 1687-1765)가 쓴 “아이작 뉴턴경의 삶에 대한 회고록”이다. 스터클리는 뉴턴의 어린 시절부터 말년까지를 기록한 문서들을 1752년에 왕립학회에 제출했고, 왕립학회는 그 문서를 공개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했다. 뉴턴의 사과나무 이야기는 42쪽에 나온다. “1726년 봄 어느 날 오후 나와 뉴턴, 두 사람은 사과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뉴턴)가 깊은 생각에 잠겨 앉아있는 때에 사과가 떨어졌다. 그는 왜 사과는 옆이나 위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며, 물질에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 자리에서 뉴턴은 중력의 개념이 이와 동일한 상황에서 자신의 머리에 갑자기 떠오르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마르틴 켐프(Martin Kemp)교수는 이 문서에 대해 “사본이나 복사본이 아니라 원본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사학자들에게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한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태양과 행성들 그리고 혜성들의 아름다운 체계는 이지적이고 능력 있는 분의 계획과 주관 아래에서만이 가능하다. 이 분은 세계의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만물의 주인으로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 때문에 그분은 주 하나님으로 불린다.” 뉴턴이 발견한 “힘을 주지 않으면 가속도는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는 “운동의 법칙(F=ma)”은 물리학을 넘어서 “노력하지 않으면 항상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라는 철학적인 메시지까지 담고 있다.
자유와 독립(自由와 獨立)에 눈을 뜨게 한, 빌헬름 텔의 사과
14세기 초기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영주 게슬러는 자신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빌헬름 텔에게 자기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화살로 맞히라는 명령을 내린다. 잔인한 명령이었지만 텔은 보란 듯이 사과를 명중시킨다. 그러나 텔은 게슬러를 사살하기 위해 또 다른 화살을 몸속에 감춘 것이 발각되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게슬러는 도리어 텔에 의해서 최후를 맞는다. 빌헬름 텔이 명중시킨 사과는 자유를 향한 스위스 국민들의 저항과 투쟁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빌헬름 텔이 실존인물인가에 대하여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프레드리히 폰 실러(1759-1805)에 의해 “빌헬름 텔”이란 희곡이 만들어 지고,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로시니(1792-1868)등에 의해 가곡이 만들어 지면서 “빌헬름 텔의 사과”는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프레드리히 폰 실러가 쓴 “빌헬름 텔”이란 희곡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 있던 스위스를 배경으로, 스위스의 사냥꾼 빌헬름 텔이 잔인한 영주인 게슬러의 음모를 이겨내고 복수하여 게슬러를 죽인다는 이야기와 마침내 스위스가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게슬러가 텔에게 아들의 머리에 놓인 사과를 쏘는 거리는 80보로 하라고 제시하자 텔의 아들 발터는 “우리 아버지는 나무에 달린 사과를 100보 밖에서도 맞춥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게슬러는 “80보에서 쏘라”고 거리를 정해 준다. 작품의 주제는 스위스의 자유와 독립정신이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텔이 아들 머리 위에 올려놓은 사과를 맞추는 장면밖에 잘 모른다. “빌헬름 텔”을 통해 스위스 인들을 넘어 전 세계인들에게 자유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프리드리히 실러이다. 나아가 실러가 스위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괴테(1749-1832)와의 만남을 통해서 비롯되었다. 결과적으로 괴테가 스위스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 실러에게 보낸 편지(빌헬름 텔의 사과이야기)는 자유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 되었다. 발칸반도가 원산지인 사과가 5대양 6대주를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된 것같이, “빌헬름 텔의 사과”에서 시작된 자유와 독립의 물결은 전 세계, 특히 약소민족들에게 들풀처럼 번져갔다.
헬레니즘(Hellenism)에 눈을 뜨게 한, 파리스의 사과
그리스인들은 “일원론”을 바탕으로 “다신론”을 근본으로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자연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 신들은 대개 남성인 반면에 “자신의 감정을 반영”한 신들은 여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트로이 전쟁이야기,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이후 이야기)”도 예외가 아니며, 역사와 신화를 넘나들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스 최고의 신, 제우스는 그리스어:의 불화(不和)의 여신이 두고 간 “황금사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큰 고민에 빠졌다. 그리스 최대 여신인, 헤라, 아테나, 그리고 아프로디테가 서로 “황금사과”를 갖겠다고 큰 다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문제의 불씨가 될 수 있는 “황금사과”를 트로이의 영웅이며 왕자인 “파리스”에게 맡겼다. 헤라는 절대 권력으로,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지혜로,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지상 최고의 미인을 주는 조건으로 파리스에게 “황금사과”를 요구 했다. 파리스는 셋 중에 아프로디테에게 “황금사과”를 줬고, 대신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를 가진 왕비 헬레네를 아내로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미인 헬레네를 아내로 얻은 파리스는 트로이로 도망을 쳤지만, 헬레네의 남편인 메넬라오스는 그리스 군대를 일으켜 트로이와 전쟁을 일으켰다. 그 전쟁에서 파리스는 물론 트로이까지 함께 멸망당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서구 학자들은 “황금사과를 취하려는 세 여신은 인생의 목표가 될 만한 가치를 상징한다고 해석하며, 순간의 선택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며, 비록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목표를 성취했다고 해도 더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오늘날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성공을 이룬 사람들도, 황금사과를 미끼로 목표를 이룬 뒤 도망친 파리스처럼,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세계 IT기업들도 애플의 “벌레 먹은 사과”를 보는 것만으로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벌레 먹은 사과”는 따먹을 수 없는 금단의 열매인지, 아니면 생존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의 머리위에 올려놓고 화살로 맞추어야 할 표적의 사과인지는 각자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