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여신상”, “민중의 여신상”, “자유의 여신상”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이집트의 랜드마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로마는 콜로세움, 그리스는 파르테논신전이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편 스포츠에서 나이키는 최고의 브랜드이자 상징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시민의 평등과 자유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이 있다.
“승리의 여신상 니케”, 승리의 상징이 되다.
2017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가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1위 브랜드로 애플을 선정했다. 반면 나이키는 16위에 올랐다. 하지만 나이키는 지금 전 세계를 석권하고 있을 뿐 아니라 스포츠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미국 나이키 회사는 승리의 여신으로 알려진 “니케”를 벤처마케팅 하여 영어식 발음으로 “나이키”(NIKE)라 했다. 나이키 로고는 포틀랜드 주립대학생인 캐롤린이 단돈 35달러를 받고 회사에 넘겼지만, 포브스는 현재 나이키 로고의 가치는 약 10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녀는 터키 에베소 유적지에 있는 니케의 날개와 옷자락의 흐르는 선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니케의 승리를 표현하는 “V”를 부드럽게 뉘어 놓는 현재의 로고를 만들었다. 오늘날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신발과 옷, 모든 스포츠 용품은 세계인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었을 뿐 아니라 승리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또 다른 니케는 파르테논 신전(파이오니오스의 니케, 기원전 435-425)에 니케의 상이 있다. 파르테논 신전에 있는 니케는 날개가 있고 종려나무가지가 손에 들려 있는 에베소 니케와 달리 승리의 상징인 날개가 없다. 그것은 승리의 여신인 니케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말고 영원히 아테네를 지켜 주길 바라는 시민들에 의해 날개가 잘려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터키가 아테네를 침공했을 때에 날개가 잘린 니케는 아테네를 지켜 주지 못했고, 오히려 아테네의 상징인 아크로폴리스는 터키 총독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1687년 베네치아 군대가 아테네를 침공했을 때는 파르테논 신전이 파괴되어 많은 부조들이 산산 조각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1805년, 영국의 대사로 부임한 엘진(Elgin)이 현재 대영박물관 8전시실에 소장된 소위 “엘진 마블스”를 비롯 1백여 점의 부조들을 빼돌렸다. 그럼에도 시인 바이런은 “오! 파르테논이여, 세계의 자랑이여…”라며 파르테논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비록 파르테논 신전은 껍데기만 남았다고 하지만 지금도 세계 수많은 여행자(트래블러, Traveller)들이 “트러블”(Trouble, 불화)속에 섭씨 40도 더위를 감수하며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오르고 있다. 유네스코는 영국이 파르테논 신전에 있는 중요한 알맹이들을 빼어가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문화유산 제 1호로 지정하고 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평등의 상징이 되다.
빅토르 위고(1802-1885)의 작품 “레 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은 1832년 6월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민중의 비참함을 다루고 있다. 반면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1830년 7월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삼고 있다. 1832년 6월 혁명이 민중이 빵을 위해 싸운 것이라면, 1830년 7월 혁명은 민중이 자유를 위해 싸운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들라크루아 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전 세계와 프랑스가 자유와 권리, 그리고 평등을 말할 때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비롯, 1830년 7월의 혁명은 봉건적인 족쇄를 폐지하고 낡은 정치체제로 회귀하려는 부르봉 왕가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여 자유를 쟁취함으로 평등한 신분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모든 혁명들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왕의 목이 단두대에서 떨어지고 귀족들이 쫓겨나는 등, 정치와 사회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불러 일으켰다.
1792-1815년 사이 폭동과 전쟁으로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약 3만 명 이상이 공개 처형되었고, 1794년 공화국이 수감한 죄수만 40만 명에 달했다. 흉년, 정치적인 혼란, 전쟁으로 인한 경제파탄, 농민들의 강제 징병과 식량 공출 등으로 시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는 프랑스 혁명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결코 평가절하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권리를 주장한 영국혁명이나 미국 독립전쟁과 달리 자유와 권리는 물론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법 앞에서 평등한 권리를 획득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선언서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정부를 거부하고 바꿀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라고 천명하고 있지만, 프랑스 인권선언은 “정부를 거부하고 바꿀 수 있는 권리보다는 정부의 권리 제한과 법 앞에서 평등한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있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이후 근대 국가와 국민들은 두 종류의 국가형태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 자유의 상징이 되다.
미국 독립 전쟁은 프랑스 혁명과 함께 근대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다. 미국의 독립을 누구보다 기뻐한 나라는 프랑스다. 프랑스는 자국의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될 만큼 독립전쟁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수많은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그럼에도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시민들이 권리를 획득한 것은 무엇과도 바꿀 없는 성과였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의 승리가 갖는 의미가 남달랐기에 미국이 독립 100주년을 맞이하였을 때 자유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을 기증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랜드마크이자 자유의 상징이 된 자유의 여신상은 지금도 변함없이 뉴욕 항구 “리버티”섬에서 오른손에 횃불을,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의 날짜가 적힌 독립선언서를 들고 세계만방에 자유의 소중함을 말없이 대변해 주고 있다.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여신상”이란 이름을 가진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뉴욕에 기증한 것이다. 프랑스 조각가 “바르톨디”가 작업의 전반을 지휘했고, 에펠탑을 설계했던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를 맡아 진행하였다. 자유의 여신상은 높이 46.1m, 무게 255t의 거대한 작품으로, 1884년 프랑스 파리에서 완공되었다. 자유의 여신상 얼굴은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모델로 삼았다. 여신상은 파리에서 214개의 조각으로 해체하여 미국으로 옮긴 후 다시 조립하여 1886년 현재의 장소에 세워졌다. 이것은 미국 독립 된 시기로부터 110주년이 되는 해이며, 그해 10월 28일, 미국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자유의 여신상 제막식이 진행되었다. 자유의 여신상은 처음에는 구리의 붉은 빛을 띠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구리의 산화 작용으로 푸른색으로 변했다. 여신상은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미국 뉴욕 시는 프랑스로부터 자유의 여신상을 받은 보답으로 프랑스에게 또 다른 자유의 여신상을 보냈다. 이것은 뉴욕에서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진 후 3년만의 일이었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뉴욕에 자유의 여신상을 기증한 것에 대해 뉴욕 시민들이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기증한 것이다. 독립과 권리를 찾는 것에 대한 기념으로 여신상을 서로 교환한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여신상의 모양은 뉴욕에 있는 것과 같지만 크기는 뉴욕에 있는 큰언니(?)를 1/4로 축소하여 만든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이 되는 1889년 11월 15일에 센느 강 “백조의 섬”에 세웠다.
“승리의 여신상”,“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리고 “자유의 여신상”은 승리와 평등한 권리 그리고 자유를 달라고 외치고 있다. 또한 여신상은 오늘 국가와 국민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는 듯하다. “여자를 이길 수 있는 남자는 없다. 총을 갖고 있는 남자조차 여자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다. 국민을 이기는 국가와 지도자는 없다. 정부는 국민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