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의 장미, 영국의 장미, 루터의 장미

“나는 환자의 비밀을 지키고 누설하지 않겠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선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는 비밀을 지키는 상징으로 장미를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로마시대 연회석 천장에는 말조심하라는 뜻으로 장미를 조각했고, 중세 교회 참회실에는 장미를 걸어 놓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장미는 사랑과 암투와 함께 순결과 생명 등 다양한 의미로 상징되고 있다.

욕망과 사치, 미의 상징,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는 오스트리아와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하여 왕비가 됐다. 그녀는 왕비가 된 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38살 생일을 두 주 앞두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주와 왕비로 살다가 떠난 마리 앙투아네트의 극적인 삶은 소설, 영화, 만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서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다. 넓은 의미로 베르사유의 장미는 궁전의 화려한 로코코의 장식(유희와 쾌락을 추구하며 사치스러운 장식 형태-글쓴이 주)과 사치와 욕망으로 치장한 당시 왕족과 귀족의 부인들에게 사용된 애칭이었다. 그럼에도 “베르사유의 장미”는 마리 앙투아네트 자신을 뜻하는 동시에 그녀가 입었던 옷은 로코코 패션과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앙투아네트의 패션은 “마리 앙투아네트 룩”(Marie Antoinette look)이라 부르며 유럽의 패션을 선도했다. “베르사유의 장미”란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세계 3대 전기 작가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쓴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전기가 출판된 이후부터이다. 이후 그녀를 주제로 만든 만화와 영화, 그녀와 관련된 작품마다 “베르사유의 장미”라고 기술하였다.

 

일찍이 장미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왕족이나 귀족들이 약용과 피부용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특히 장미는 결혼식에서 없어서는 안 될 꽃이었지만 장례식에도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는 꽃이었다. 전쟁에 승리한 영웅과 군대를 환영하기 위해 시민들이 거리와 발코니에 장미꽃잎을 수 없이 뿌렸다. 그 가운데 장미 향수는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이집트의 절세미인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붙잡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뿌린 꽃도 장미였고, 안토니우스가 죽으면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자신의 무덤에 뿌려달라고 부탁한 것도 장미였다. “나폴레옹”이 “조세핀”을 위해 바닥에 깐 꽃잎도 장미였고, 정열의 무희 “카르멘”이 자신의 요염함을 보이기 위해 선택한 꽃이 바로 진홍빛 장미였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확인하고 다소 심하게 말해 사랑을 구걸하기 위해 장미가 동원되고 있다. 장미(薔薇)의 한자말은 “담장에 기대어 자라는 식물”이란 뜻으로, 장미는 여자와 비교할 때에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여자는 장미와 같이 기대는 본성이 있으며 장미가 병충해에 약하듯, 여자 또한 유혹과의 전쟁이라 할 만큼 미적 본성과의 싸움에서 취약하다. 색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1887-1985)은 “장미와 여인(1929)”이란 작품을 통해서 장미와 여자는 아름다움을 뽐내는 본성이 비슷하며, 질투심마저 속 빼 닮은 것으로 묘사했다.

 

권력과 암투, 화합의 상징, 영국의 장미

영국에서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 1455-1485)은 30년간 진행됐다. 장미전쟁은 역사에서 붉은 장미를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한 랭커스터 가(家)와 흰 장미의 요크 가 사이에서 왕위 계승권을 놓고 벌어진 내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미전쟁의 이름은 흰 장미를 문장(紋章)으로 사용한 요크가문과,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사용한 랭커스터 두 가문이 투쟁한 것에서 비롯됐다. 양 측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갑옷위에 랭커스터 가문은 붉은 장미를 새겼고, 요크 가문은 흰 장미를 달았고,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에도 서로의 장미를 앞세웠다.

15세기 영국에서 붉은 장미와 흰 장미는 “대립의 상징물”로 서로 공존할 수 없는 투쟁의 대상이었다. 두 가문이 벌인 치열한 장미전쟁은 결국 1485년 보스워스 전투에서 랭커스터가의 유일한 왕위 요구자인 헨리 튜더가 요크가의 리처드 3세를 물리침으로 끝났다.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요크 가문에 속해 있는 엘리자베스를 왕비로 맞아들임으로 새로운 튜더 왕조를 열었다. 이로 인해 봉건사회제도가 무너지고 새로운 절대왕정이 시작되었다.

 

헨리 7세는 랭커스터가의 상징인 붉은 장미와 요크가의 상징인 흰 장미를 섞어서 새로운 “튜더 로즈” 문장을 만들었다. 이후 장미는 영국의 국화가 되었고, 붉은 장미와 흰 장미의 결합은 화합의 상징이 되었다. 영어권에서는 흰 장미를 “White rose”라고 부르지 않고, “요크가의 흰 장미”(White rose of York)라고 부른다. 요크가의 흰 장미는 빅토리아 여왕의 결혼식 때부터 사용될 만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런 전통은 빅토리아시대 이후 지역에 상관없이 구혼자가 청혼을 할 때나 신부의 부케용으로 선호하는 꽃이 되었다. 헨리 7세에서 시작된 튜더 왕조는 마지막 다섯 번째 왕, 앤블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끝나게 된다. 잉글랜드에서 튜더 왕조는 불과 5명의 왕에 의해 118년 정도 아주 짧지만 다른 왕조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영국의 역사를 크게 바꿔 놓았다. 영국 역사를 말할 때 튜더왕조에 속한 헨리 8세, 앤 불린,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등이 빠지지 않는다. 5월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붉은 장미와 흰 장미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영국인들에게는 쓰리고 아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다.

희생과 생명, 고백의 상징, 루터의 장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시 “장미의 내부”라는 시에서 장미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어디에 이런 내부를 감싸는 외부가 있을까? 어떤 상처에 이 보드라운 꽃잎을 올려놓는 것일까? 이 근심 모르는 활짝 핀 장미꽃의 내부 호수에는 어느 곳의 하늘이 비쳐 있을까 보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일찍이 혼탁한 세상 앞에서 장미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장미에 새겼다. 루터는 “하늘색 바탕위에 흰 장미의 중심에 붉은 심장과 그 안에 검은 십자가를 두었고, 그리고 흰 장미 둘레에는 ‘그가 사신다.’(Vivit)라는 글귀를 새긴” 문장(紋章)을 만들어 “내 신학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루터는 자신이 저작한 모든 문서에 루터의 장미(Luther Rose)는 찍도록 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저작한 원본임을 증명하고 복제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루터는 자신이 만든 “장미 문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우선 자연색의 심장 안에 검은 십자가가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믿는 신앙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나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마음으로부터 믿으면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검정색의 십자가는 고난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심장을 파괴하지 않으며 죽음을 가져오지 않고 생명을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롬1:17)라고 한 그 믿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심장이 흰색 장미의 한 가운데 놓여있는 것은 믿음의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약하면, 믿음은 우리를 화려한 장미의 뜰로 인도합니다. 믿음이 주는 평안과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기에 장미의 색깔은 흰색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흰색은 영들과 천사들의 색이기 때문입니다. 흰 장미는 하늘색으로 둘러싸여있는데 이는 성령과 믿음 안에서의 그러한 기쁨이 앞으로 맛보게 될 하늘나라의 기쁨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그 하늘의 기쁨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고 다만 소망 중에 붙잡는 것입니다….(중략) 이것은 나의 모든 신학의 요약 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평가를 기대하며 우정 속에서 이것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토록 당신과 함께 하시길! 아멘!”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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