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독일의 역사를 말할 때에 “가깝고도 먼 이웃”이란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두 나라는 불과 제 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앙숙이었다. 나폴레옹시대부터 약 140년간 양국은 네 차례나 큰 전쟁을 치렀다. 전쟁의 결과는 4전 2승 2패였다. 프랑스는 독일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에서 승전 기념식을, 독일은 프랑스의 상징인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각각 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밀월 관계를 유지하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다.
나폴레옹과 독일전쟁『1 대 0』
1804년 7월, 나폴레옹(Napoleon,1769-1821)은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12월 2일에 프랑스의 황제, 곧 나폴레옹 1 세로 즉위(1804-1815)하였다. 그는 역대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을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했다. 자신은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한 군주가 아닌, 대로마 제국 샤를마뉴(프랑크왕국)대제의 후계자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대관식은 호사스러운 것은 물론 교황 비오 7세(1800-1823)까지 끌어들여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며 프랑스 제국을 출범시켰다. 반면 이를 지켜보고 위기의식을 느낀 영국과 프로이센, 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은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였다. 예상대로 나폴레옹은 이듬해인 1805년 신성로마제국을 선제공격하여 해체한 후에 독일의 서남쪽을 프랑스에 합병시켰다. 이로 인해 1천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지켜온 신성로마제국은 영구히 막을 내리게 되었고, 황제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되었다.
프랑스의 패권이 독일 중부까지 미치자, 마침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더불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지만, 도리어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통과하여 러시아까지 진격하였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방위하는 범위를 넘어 험준한 알프스의 협곡까지 넘어 전 유럽을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전쟁으로 확산시켰고, 이를 위해 60여 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나폴레옹은 전차가 아닌 오직 말의 등에 앉아서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 유럽의 서쪽 스페인에서부터 동쪽으로 모스크바 턱밑까지, 북쪽으로는 덴마크부터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탈리아까지 전 유럽을 석권했다. “불가능에 도전하라!” 라는 말과 함께 무수한 수식어를 남기며 승리를 거듭했지만, 1813년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쟁에서 패하여 엘바 섬으로 유배됐다. 그러나 용케도 유배 생활을 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에 그는 극적으로 탈출하여 다시 권력을 잡았지만, 1815년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배하므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마지막 생을 마쳤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의 패권주의가 이전과 또 다른 투쟁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나폴레옹에 대해 “보라! 저기 말을 탄 세계정신이 온다.”라고 한 말이나, 영국의 역사학의 거장인 폴 존슨이 “1815년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라는 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비스마르크와 프랑스 전쟁『1 대 1』, 프랑스와 독일 전쟁『2 대 1』
역사는 다시 소용돌이쳤다. 1871년 1월,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를 보불전쟁(1870-1871)이라 부른다. 보불이란 프로이센(普魯西, 보로서)과 프랑스(佛蘭西, 불란서)의 한자 표기이다. 이로써 프랑스와 독일 전쟁의 승점은『1대 1』이 되는 셈이다. 1862년 빌헬름 1세의 지명으로 재상이 된 비스마르크(Bismarck, 1815-1898)는 1871년 1월에 프랑스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를 초대 독일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함으로 보불전쟁 승리와 독일 통일을 과시했다. 독일의 승리로 프랑스로부터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획득함과 50억 프랑이란 전쟁의 보상금까지 챙겼다.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테는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패하였을 때의 비극을 “마지막 수업”이란 작품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했다.
전쟁에 패한 프랑스는 밖으로 식민지 획득에 눈을 돌렸지만, 내부적으로는 와신상담(臥薪嘗膽-목적을 위해 괴로움을 참음)하며, 호시탐탐 반전의 기회를 노렸다. 1914년 더디어 프랑스가 독일에 복수할 기회가 왔다. 바로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이다. 제 1차 세계 대전은 경제적인 이유도 컸지만,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갈등과 보복이 불러온 소모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잔혹한 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900만 명이라는 최대의 사상자를 낸 후에 독일이 항복함으로 4년 4개월 만에 끝났다. 프랑스 국민들은 환호했다. 1919년 6월, 프랑스는 48년 전 독일이 제국선포식을 거행한 바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프랑스는 독일로부터 받은 치욕을 갚을 목적으로 동일한 장소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베르사유 궁전은 단순히 태양왕 루이 14세의 화려함의 극치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의 영광과 수치, 영욕이 뒤얽힌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잃었고, 알자스와 로렌지역을 다시 프랑스에 돌려줘야 했다. 독일이 상실한 영토는 당시 독일 면적의 13퍼센트에 이르렀다.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패배 후 48년 만의 설욕이자 전쟁 스코어는 다시『2대 1』로 벌어졌다. 이 스코어는 또다시 원한과 복수심을 불타오르게 했고,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와 프랑스 전쟁,『2 대 2』
20년이 지났을 쯤 독일이 또 다시 전쟁을 감행했다. 바로 제 2차 세계대전이다. 1940년 5월, 아니나 다를까 독일은 가장 먼저 프랑스를 침공했다. 독일의 전략은 프랑스의 허를 찔렀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두 개의 루터를 통해 프랑스를 공격했다. 첫째는 황색 상황(Fall Gelb)으로 벨기에에서 네덜란드 쪽으로 연합군을 깊숙이 유인한 뒤 기갑 부대를 아르덴 지역으로 통과시켜 연합군을 포위, 섬멸하므로 프랑스 영토를 유린했고, 두 번째는 적색 상황(Fall Rot)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을 측면으로 공격해 무너뜨린 뒤 파리를 점령했다. 결국 프랑스는 독일군대가 공격을 시작한 지 6주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하버드 대학과 역사학자인 어네스트 메이 교수는 “독일군의 승리는 지휘부의 상상력에서,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의 패배는 느린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그러한 습관을 간파하여 이 약점을 최대한 활용했다.”라고 말했다. 독일 국민은 국가적 굴욕을 청산한 히틀러에게 열광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스코어는 다시『2대 2』, 동률이 되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도움을 받은 프랑스는 드골 장군의 영도 하에 국토를 수복하고 승전국가의 대우를 받았다.
전쟁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동일하게 유럽 정복의 꿈을 가졌으나, 둘 다 영국과 러시아에 의해 좌절 되었다. 역사가들이 패배의 원인을 복잡하게 여러 말로 궁시렁 거리고 있지만, 여기에 딱 어울리는 말이 하나 있다. “Bite more than you can chew”(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게 베어 물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영국과 러시아를 씹고 난 후에야 비로소 씹기에 너무 큰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 패배의 원인이었다는 말이다.
축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스코어는『3대 2』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쟁은 전혀 달랐다. 전쟁 스코어가『2대 2』, 동률이 된 두 나라는 1945년 2차 대전 종전 이후 혹시나 전쟁 스코어가『3대 2』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위기의식을 갖게 됐다. 양국은 전쟁으로 극심한 손실과 쇠퇴를 경험한 이후 비로소 과거의 원한 관계를 끊고 국력의 재도약을 위해 역사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하며 화해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1962년 9월 5일,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독일과 연방총리 아데나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외쳤다. “본 만세! 독일 만세! 독일과 프랑스의 우정 만세!” 지금은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는 유럽연합(EU)의 선두 자리를 놓고 가끔 신경전을 벌일 때도 있지만, 과거의 아픈 상처만큼은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영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