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조르다노 브루노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그리고 조르다노 브루노, 이들은 모두 “지동설”을 주장한 과학자들이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점이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임종 직전에 지동설을 세상에 내놓았으며, 갈릴레이는 종교재판 앞에서 자신이 주장한 지동설을 철회했다. 그에 비해 조르다노 브루노는 끝까지 지동설을 주장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코페르니쿠스, “사람이 우주의 중심임을 피력하다.”

 

최초로 태양 중심의 우주론인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은 폴란드의 천문학자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였다. 당시의 천문학적인 이해는 BC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견해를 그대로 주장한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AD 83-168)의 천동설을 따르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세상 모든 사람들은 1500년 이상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태양과 별들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 그는 당시 진리처럼 믿어온 천동설의 오류를 지적하고 지동설을 주장하여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가져왔다. 사실 천동설은 중세 로마교회의 거역할 수 없는 도그마였고, 신앙의 조항으로 지동설은 로마교회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혁명적 견해였다. 그가 지동설을 쉽게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은 이단자로 몰리는 것은 물론, 그 파장을 스스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임종 직전에야 지동설에 관한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내놓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어중간한 입장을 취했다. “하나님이 우주 중심에 촛불(태양)을 켜 놓는 것이 옳지 신전 안에서 돌도록 해놓았을 이유가 있겠느냐?” 다행인지 몰라도 그의 책이 출판되어 세상에 공개 될 즈음에 그는 숨을 거둠으로 재판자리나 이단으로 소환되거나 그리고 목숨을 구걸할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바울이 가진 특권이나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원한다.” 그가 죽은 후에 로마교회는 당연히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취급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단순히 우주의 중심이 태양에서 지구로 바뀐 획기적인 과학의 발견보다 큰 충격적인 것은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다.”라는 발견이었다. 즉 창조의 중심은 지구이고, 지구의 중심은 사람이란 세계관의 발견이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곧 천문학의 혁명이전에 인간 중심의 혁명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중세교회가 과학까지 지배하려 한 것은 물론 잘못된 오류마저 수정하지 못할 정도로 교권주의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543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67년이 지난, 2010년 5월22일, 폴란드는 코페르니쿠스의 두 번째 장례식을 프롬보르크 대성당에서 성대히 거행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성경을 통해 과학을 중명하다.”

 

1564년 셰익스피어가 출생하던 해,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수식어가 참으로 많다.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기하학, 물리학, 천문학 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지구의 자전과 해를 중심으로 한 공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코페르니쿠스가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한 이후 뒤를 이어 갈릴레오가 천체 망원경을 개량하여 “목성의 위성”, “달의 반점”,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정당함을 입증하였다. 또한 “황금 측량자” 및 “천문학 대화”를 출판하여 지동설을 더욱 강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갈릴레이는 무엇보다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은 지구를 공중에 매달아 놓으시고…”라고 기록한 욥기 26장 7절의 말씀을 통해 “달이 지구를 돌 듯이 지구는 태양을 돈다.”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지동설이 성경과 절대 모순되지 않음을 확신하였다. 이런 확신은 그의 신앙고백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권의 책을 주셨는데, 한 권은 자연이라는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성경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솜씨를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라는 책에서 배운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갈릴레오는 로마교회로부터 지동설을 철회하도록 계속 강요받았고 재판에 회부되어 8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임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모든 저서는 불태워지거나 금서 목록에 올랐다. 그럼에도 그가 지동설을 포기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 불편했던 진실을 세상 밖으로 들러내기 위해 거짓과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발명한 천체 망원경을 통해 지동설에 대한 수많은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체 망원경은 그가 지동설을 발견하는 일등공신이 되는 역할을 했다. 한편 갈릴레이가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외쳤다고 하는 말 때문에 그가 진리를 위해 싸운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속설과는 달리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회부된 후 화형과 고문의 회유 앞에서 지동설을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는 수모를 당하면서 자신이 끝까지 주장하고 싶었던 지동설을 철회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로부터 35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지난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당시 교황청이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재판이 잘못된 것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갈릴레이에 대한 사죄와 함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조르다노 브루노, “성경이 말한 과학의 진리를 위해 화형당하다.”

 

1600년 2월 17일,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가 화형대에 올려졌다. 그는 이탈리아의 사상가이며 철학자로, “무한 우주론”과 “지동설”의 신봉자였다. 1584년 그는 “무한의 우주와 세계”(of infinity, the universe and the world)라는 책을 펴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우주는 무한하게 퍼져 있고 태양은 그 중에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들도 모두 태양과 같은 종류의 항성이다.”라는 무한 우주론을 주장했다. 천동설과 “우주는 유한하다.”고 믿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쉽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없었음에도 그는 무려 8년 동안 종교재판에서 심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591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의 혐의를 선고받아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하는 나보다 나를 묶고 불을 붙이려는 당신들이 더 공포에 떨 것이다.” 브루노는 신학적으로도 로마교회와 다른 주장을 하여 눈에 가시처럼 보인 것도 사실이지만 과학 이론의 충돌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화형을 당했다는 점에서 “과학의 순교자”라고 불린다.

 

진리는 어떤 개인이 철회한다고 손상되거나 반대로 끝까지 주장한다고 가치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와 사상에 대한 인식을 상대화 한 것이 지식이라면 그가 믿고 있던 것을 끝까지 주장하는 태도를 신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브루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바로 신앙인 것이다. 브루노가 후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그가 발견한 과학적인 지식 때문이 아니라 순교의 방법으로 철학적인 신앙을 확정하였기 때문이다.

 

1899년 빅토르 위고를 비롯, 헨리크 입센, 바쿠닌 등 당대에 내 노라 하는 사상가들이 로마 “캄포데 피오리 광장”(꽃의 광장)에 그의 동상을 세운 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브루노에게, 그대의 몸에 지펴진 불로 시대의 미래가 밝혀졌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이 주장한 지동설로 인해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자 취급을 받을 기회가 없었지만 갈릴레이는 사정이 달랐다. “나는 거짓 없는 신앙으로 지동설의 잘못된 주장을 하였음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학자의 양심을 저버려야 했다. 이에 대하여 칼 야스퍼스(1883-1969)는 “갈릴레이는 ‘지식’을 가졌고, 브루노는 ‘신앙’을 가졌다. 갈릴레이의 지식은 본인이 부인(否認)을 해도 훼손되지 않는 과학적 발견이었으나 브루노의 지식은 부인하면 훼손되는 종교적 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