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

성경 : 마태복음 21 : 1-11,  3.25(종려주일)

4 복음서에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기록이 25장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 동안 당하신 고난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은 오늘 본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많은 무리들은 겉옷과 종려나무가지를 길에 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실을 통해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나귀 주인은 알고 있었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위해 두 제자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네게로 끌고 오라.”하셨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 주인의 허락을 받아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이 4복음서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나귀 주인이 주님을 위해 어떻게 나귀를 선뜻 내어줄 수 있었을까?”하는 것입니다. 나귀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짐을 실어 나르거나, 이동할 때 없어서 안 될 교통수단입니다. 또한 나귀는 한국 농촌에서 소가 살림 밑천이었던 것처럼 아주 소중한 자산을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아무 조건 없이 내어 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요구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적용한다면 매일 승용차로 출퇴근하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차를 빌려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매일 출퇴근하는 차를 빌려달라고 할 때 선 듯 내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나귀 주인은 주님에게 나귀를 내어줌으로 불편은 물론,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는 사실입니다.

 

나귀가 묶여 있었던 동네는 “벳바게 맞은 편 마을”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을이 바로 “베다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을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웃동네입니다.

 

베다니는 어떤 동네입니까? 주님이 나사로를 살린 곳이며,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은 곳이며, 많은 병자들을 고친 곳입니다. 베다니는 “괴로움의 집”이란 뜻이지만, 베다니 동네사람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때문에 베다니 사람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베나니 사람들은 주님이 나귀를 사용하시겠다고 하였을 때, 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3절)“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주가 쓰시겠다.”란 “네 주인이 꼭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주”(퀴리오스)라고 표현한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직접 내가 주인이다.”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주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마16:16)“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은 나의 구원자가 되실 뿐 아니라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나니 사람들, 특히 나귀

주인은 자신의 인생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12:1)“너는 청년의 때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내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 생명과 힘과 능력, 모두가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됨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1. 무리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노르웨이 하콜 왕이 한 신하와 함께 마차를 타고 눈이 많은 오슬로 지방을 순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고로 마차가 부서지면서 왕은 괜찮았지만, 신하는 크게 중상을 입어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은 신하를 마차에 태우고 왕이 마차를 끌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 “사진과 함께 왕이 사고를 당했지만, 신하가 왕을 무사히 구출했다.”라고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왕궁으로 돌아와 이 기사를 본 왕이 기자를 불러 “왜 사실대로 보도하지 않았느냐?” “왕과 신하를 구분하지 못하느냐?”고 하자 신하가 답변하길 “왕이 종의 행세를 하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답변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만왕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나귀를 타고 종의 행세를 하므로 사람들이 몰랐던 것입니다. 나귀는 영어로 동키(donkey)라고 하며, 수컷은 잭(jack), 암컷은 제니(jenny)라고 부릅니다. 유럽에서 고집불통인 사람을 “당나귀(Donkey)같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작품 속에 나오는 돈키호테의 시종 산초가 탔던 것이 바로 나귀입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 무리들이 자신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이뿐 아니라 (10-11절)“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냐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수님이 출생하였을 때 “유대인의 왕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나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가 입성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크게 흥분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드디어 우리 민족을 로마로부터 해방 시킬 메시야가 왔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를 정복하고 자기 민족을 해방하는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장군이나 메시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로마를 정복할 수 있는 장군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실망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이유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일주일 만에 돌변하였습니다. (눅23:18-21)“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무리들은 주님으로부터 떡을 얻어먹고, 병 고침을 받고, “호산나”하며 환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살인자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쳤습니다.

 

한국은 작년에 촛불집회를 통해 대통령을 탄핵하였습니다. “탄핵하라”, “구속하라” 그 결과 시민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렸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시민들은 이제 태극기를 들고 또 대통령을 탄핵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군중심리와 민심은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거품처럼 올랐다가 금세 사라지는 것이 군중입니다.

 

 

마태는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5절)“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주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낮아지시고 겸손하게 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 세상 정복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에 권세를 부리고 힘을 과시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남에게 군림하고, 큰소리치고, 약한 자를 무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겸손함입니다.

 

  1.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 스가랴가 말씀하시다.

나귀는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교통수단입니다. 나귀는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많은 짐을 지고 산과 사막, 들판 어디서나 짐을 지고 갑니다. 이런 이유로 “나귀는 짐을 지는 동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구약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을 나귀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5절)“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즉, 주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우리의 모든 짐을 지신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는(사53: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같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하셨습니다.

 

“담당”이란 “모든 짐을 지우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지고 있는 모든 죄의 짐을 주님에게 지우셨다.”는 뜻입니다. 죄는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짐입니다. 세상에서 죄만큼 무거운 짐이 없습니다. 다윗은(시32:1-3)“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사람이 태어날 때 뼈는 약 350개 정도이며, 어른이 되면서 서로 붙어 200개정도 된다고 합니다. 뼈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피를 만드는 것과 인체에 필요한 영양분을 저장하는 역할입니다. 한마디로 “뼈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며 출발지”란 뜻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표현할 때 “뼈 속 깊이 사무치다” “뼈를 깎다.”“뼈 빠지게 일하다.” 사람이 감내 하기 힘든, 최고의 고통을 표현할 때 “뼈가 아프다.”라고 합니다. 다윗이 “뼈가 아프다.”는 것은 “생명의 뿌리가 아프다.”란 뜻입니다.

 

죄는 우리를 넘어지게 할 뿐 아니라, 인생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죄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기쁨과 소망,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습니다. 죄를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일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의 짐을 져 주셨습니다.

 

주님이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의 왕과 같은 모습이 아닌,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 짐을 져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귀를 타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깊이 세기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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