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고린도전서 15 : 12-19, 2018. 4. 1(부활주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과 가정에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사람의 지식으로 이해될 수 없는 대표적인 사건은 동정녀 탄생과 부활입니다. 단 한번밖에 일어난 일이 없었고 앞으로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헬라철학의 영향으로 영혼의 존재와 불멸은 믿었으나, 죽음이후 육신의 부활은 믿지 않고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15장 전체를 할애하여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면서 “어찌하여 부활이 없다 하느냐?” 반문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질문한 “어찌하여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부활을 믿지 않은 자들에 대한 대답
고린도교회는 부활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12절)“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생각하였고, 또 한 편에서는(35절) “죽은 자들이 어떻게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는가?” 생각하였습니다. 전자는 부활 자체를 의심하는 질문이며, 후자는 부활의 믿기는 하지만, 어떻게 부활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속한 성도들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당시 지식인들이라 불리는 사두개인은 부활을 부인하였습니다. (행23:8)“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하고”
사실 3년 동안 주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마저도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 제자들에게 부활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눅24: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누구보다 베드로는 주님을 철저하게 부인한 자입니다. 저주하며 모른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기 잡으러 가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시간을 보내러 가자”는 말이 아니고, “직업을 바꾸자”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그가 두 달이 채 못 되어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행5:29-31)“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주님을 강하게 부인하던 베드로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역시 처음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이 확끈하게 믿었더라.”고 기록했다면 사람들은 “저들끼리 다 짜고 그렇게 했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제자들도 처음에는 “의심하고” “잠꼬대하는 소리”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또한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살 수 있다.”는 지식은 인간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여러분과 제가 지금껏 헛되게 살아 온 것입니다. 그동안 저와 여러분은 연극을 한 것이 됩니다. 아울러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수천, 수억의 사람들에게 사기를 친 셈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부활이 없다면 매일 슬픔과 괴로움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5:32)“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친구는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사람에게 “내일이 없는 것”보다 큰 불행이 없습니다.
- 어떻게 하면 부활을 믿으시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도마란 제자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라고 하자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아야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눈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합니까? 아주 좋아 보여 옷을 구입했는데, 집에 돌아오는 순간 후회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 남자가 너무 멋있고, 저 여자가 너무 예뻐 결혼하면 한 평생 행복할 것 같아서 몇 년을 기다려 결혼했는데, “내 눈이 삐었지?” 생각해 본 없습니까? 눈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유효 기간은 불과 3개월이란 통계도 있습니다.
철학 가운데 실증주의란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콩트가 주장한 것으로 “모든 것을 관찰이나 실험으로써 검증할 수 있는 지식만을 인정” 하는 사상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관찰과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은 감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본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손으로 만진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려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도마의 요구대로 (27절)“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면서 도마에게 손으로 직접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도마는 비로소 자신이 요구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도마는 자신이 자기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직접 만져 보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부활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부활한 주님을 손으로 만져 보면 믿으시겠습니까? 우리도 도마와 같은 생각을 한번쯤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롬10:17)“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경은 확실한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전15:3-4)“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23절)“그러나 각각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은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부활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20절) “첫 열매가 되었다”부활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우리의 부활을 위한 것입니다. “다음은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예수 믿는 자를 총칭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나중이니” 이것은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를 총칭한 말입니다.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육체의 부활은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있습니다.
(살전4:16-17)“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 우리 살아남은 자도..” (롬6:4-5)“우리가 주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 때가 남아 있습니다.
부활을 아무리 믿으려 해도 잘 믿어지지 않는 분은 없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시면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께서 역사 하시면 차돌같이 단단한 마음도 변화되며,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넘어할 고비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부활신앙이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리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눅24:25)“미련하고 선지자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자들이여”라는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이 부활이라는 문턱에서 주저하게 됩니다. 부활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부활이 해답이다.
모든 인생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제자들은 풍랑으로,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마저도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을 무서운 것은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큰 낭패와 실패도 죽음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죽음 앞에서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활만이 인생이 가진 두려움인 죽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음 앞에 두려워 떨고 있는 마르다 마리아를 향해 (요11:25-26)“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신 것입니다.
스데반 또한 부활을 확신하였기에 죽음을 두려워 않고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입니다. 성도는 무덤을 앞에 놓고 사는 자가 아니라, 부활을 앞에 놓고 사는 자들입니다.
(고전15:53)“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롬6:23)“죄의 삯은 사망이요” 죽음은 분명 아픈 것이며, 죄의 결과 온 것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이 죽음의 길을 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절대적이며, 보편적입니다. “왜 내가 죽는가?”가 아니라 “나도 역시 죽는다.”는 자세가 바른 태도입니다. 죽음은 이상한 일, 이해 못할 일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고 그럴 수 있는 그리고 나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시기에 비중을 두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시간과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히9:27)“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 자체의 두려움보다는 죽음 후에 있는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계14:13)“주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도다.”(시116:15)“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복된 죽음을 위해서 오늘을 바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오늘의 교회를 탄생하게 했고, 오늘 우리의 부활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부활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죽음에서 살아남으로 부활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부활 하셨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갖고,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과 죽음의 문제가지도 극복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