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 렘브란트, 카라바조의 “목자들의 경배”

“엘 그레코”와 “렘브란트” 그리고 “카라바조”는 “바로크(baroque-일그러진 진주), 17세기 초-18세기 미술양식”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의 거장들이다. 그들은 “목자들의 경배”를 통해 메시지를 다양하게 표출했지만 “경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 모두는 루터가 말한 신앙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경배)하는 것이다.”

엘 그레코, “어린 아기가 소외된 자들에게 빛을 비추다.”

 

모든 화가들이 그러하듯이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역시 자기만의 독특한 기법을 가진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리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공부하여 스페인에서 활동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적어도 세 나라의 문화와 역사, 특히 스페인에 정착하여 궁정화가로 활동할 만큼 그의 작품 대부분은 가톨릭의 강한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엘 그레코는 수많은 성화를 그렸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에스폴리오”, “톨레도의 풍경” 등을 남겼으며, 그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레코의 “목자들의 경배”(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는 톨레도에 있는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교회의 가족 채플에 걸어 두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그레코가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아닌 “목자들의 경배”를 화폭에 담은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기 위함이었다.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상징하거나 강조한 것은 14세기 이탈리아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레코가 크게 영향을 받은 마드리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역시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수도회를 설립한 알론소는 수도사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으로 목격했던 목자들처럼 밤을 새워가며 양들을 돌보며, 양 틈에 끼여 들판에서 잠을 청해야 했던 목자들과 같은 영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레코 당시 스페인교회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과 무어인들에게 사제서품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 최대 논쟁거리였다. 스페인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톨레도의 대주교는 혼혈인과 유다인 출신에게 사제서품을 주는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수도원장의 입장은 달랐다. “사람은 부모보다 시대를 닮는다.”라는 말처럼 그레코 또한 사회적인 약자들에게도 성직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마구간에서 아주 중요한 소를 생략하고 이방인을 상징하는 나귀와 목자들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다리가 묶여진 어린 양을 화폭에 담았다. 그레코가 다리가 묶인 어린양을 강조한 것은 “어린양 되신 예수그리스도가 소외된 자”를 위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과 당시 스페인 가톨릭교회의 교권주의와 반유대주의 사상을 고발한 것이다.

 

렘브란트, “어린 아기가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다.”

 

“그가 창안한 것은…다른 화가들이 사용해 본 적도 없고, 다른 곳에서는 볼 수조차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발디누치(Baldinucci)가 렘브란트에 대해 언급한 말이다. 빛의 마술사, 자화상의 화가로 알려진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네덜란드 미술사에 황금시대를 불러온 최고의 화가로 “돌아온 탕자”등 종교화와 수많은 걸작품을 남겼다. 렘브란트의 “목자들의 경배”의 배경은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이 아니라 자신의 고국인 네덜란드에 있는 작은 마구간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그는 성경의 기록대로 낮은 곳에 임하신 그리스도를 택했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도 가난하고 겸손한 목자들로 정했다. 그가 그린 “목자들의 경배”에는 마구간에 흔히 있을 법한 소나 나귀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서에 소와 나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을 감안한 것으로, 그는 최대한 성서에 가깝도록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화폭에 담긴 인물들이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지만 희미한 마리아와 요셉의 얼굴과 아기 예수 앞에 두 목자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목자들은 들판에서 천사가 “메시야가 오셨다.” 라는 소식을 듣고 한 밤중에 양떼를 지키다가 달려왔기에 그들의 옷은 땀과 먼지로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갈아입을 옷조차 없어 보였고, 손에는 어떤 예물도 없었다. 비록 그들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진심으로 경배 드리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목자들의 경배”에서도 깊은 내면의 세계를 표현할 때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어둠과 빛” 즉 “음영의 뚜렷한 대조”하는 기법을 채택했다. 그는 빛을 통해 모든 시선을 어둠 속에 쌓여 있는 아기 예수에게 집중되도록 하였다. 여인숙 주인처럼 보이는 노인이 들고 있는 등불도 아기에게로 집중되고 있다. 그런데 어린 아기 예수에게서 비친 그 빛은 다시 반사되어 각 사람의 얼굴과 마구간의 구석구석까지 밝히 비추고 있다. 렘브란트는 아기 예수가 온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카라바조, “어린 아기가 어둠에 싸여 있는 교회에 빛을 비추다.”

중세 르네상스 미술이 질서정연하여 조화로운 것에 비해 바로크 미술은 과장되고 파괴적인 표현, 그리고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이 그러하듯 바로크 미술 또한 로마에서 시작됐다. 바로크 미술의 대표적인 최초의 사람이 바로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성경의 인물들을 화폭에 담을 때에 르네상스시대 화가들이 미화하고 이상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과 달리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그는 아주 일상적인 평범한 사람, 심지어 당시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매춘부, 협잡꾼을 주인공으로 미화시킴으로 당시 사회를 충격 속으로 빠트리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극단적인 표현은 “목자들의 경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목자들의 경배”는 먼 여행과 해산의 고통으로 매우 지쳐 있는 한 여인이 구유에 비스듬히 기대어 포대기에 싼 아기 예수를 안고 있다. 여인은 초라한 시골 아낙네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기는 지쳐 있는 어머니의 뺨에 얼굴을 대고 있고, 아기는 마치 배고파 칭얼거리는 듯하다. 그림의 왼쪽 아래에는 녹슨 농기구와 함께 요셉과 마리아가 먼 여행길에 들고 온 허름한 가방이 놓여 있다.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목자들의 모습도 남루하기는 마찬가지다. 목자들의 머리는 벗겨지고, 어깨는 드러나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다. 그리고 목자들은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의 상태다. 목자들의 모습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여실히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뿐 아니라 천군천사의 출현도 없으며, 천사들의 노래와 찬양도 없으며, 오히려 천군천사가 있어야 할 곳에 소와 당나귀가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목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아기 예수와 마리아”는 평범하다 못해 불상하고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르네상스 화가들이 장엄하고 숭고하게 표현한 아기 예수와 존귀한 마리아의 모습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카라바조는 “목자들의 경배”를 통해 아기 예수는 배고프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가운데 오신 사실을 극대화했다. 이것은 당시 교회가 귀족화 내지 세속화 되도록 만든 교권주의를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바로크 화가들이 그린 종교화 대부분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카라바조의 “목자들의 경배”에서도 빛보다 어두움이 더 짖게 드리워져 있다. 어둠이 강렬하게 엄습해 오지만, 그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빛보다 어두움이 짖게 깔려 있는 바로크 미술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이후, 가톨릭에 대한 반종교 성향이 강해지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목자들의 경배”는 비단 과거만이 아닌, 지금 시대와 교회에도 어두움이 짖게 드리워져 있음을 보여 주는 명화임이 틀림없다. “미술은 혁명이다.”라고 한 “폴 고갱”의 말을 생각할 때, 그림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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