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위클리프」, 「얀 후스」, 「사보나롤라」

2012년 독일정부는 “세계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독일인은 누구인가?”를 물었다. 그 첫 번째는 괴테도, 베토벤도 아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였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루터 이전에 로마교회의 권력과 싸우다 순교한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 체코의 얀 후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존 위클리프, 성경 번역과 저서들이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가장 먼저 횃불을 들었다. 당시 영국과 유럽교회는 온통 타락하여 깊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터무니없이 거짓된 교리들 전파하는 것에 대해 개혁의 기치를 들었다. 그는 많은 저서들을 통해 교회개혁에 앞장섰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존재에 관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관하여”, “시민 통치에 관하여”, “성경 진리에 관하여”, 그리고 “교황 권력에 관하여” 등을 통해 “결코 교황이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교회의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위클리프의 가장 큰 업적은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일이다. 위클리프의 성경 번역은 150년 후에 윌리엄 틴 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 히브리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Tyndale’s Version, 1524-34)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에는 성경 번역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고, 성경은 소수 사제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위클리프가 내건 유명한 구호 가운데 하나는 “성경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낼 것이다.”였다. 훗날 링컨이 게티즈버그에서 위클리프의 말을 인용하여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는 명연설을 남겼다.

 

존 위클리프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에 의해 1377년 정죄를 받았고, 그가 죽은 지 31년 지난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 독일)에서 이단 판결을 받았다. 그가 남긴 수백 편의 저서들은 발매 금지되었고, 눈에 띄는 대로 불태워졌으며, 그의 무덤은 다시 파헤치도록 결정되었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위클리프가 죽은 지 44년이 지난 1428년 그에 대한 형을 다시 집행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시체는 부관 참시되어 뼈까지 불태운 후 남은 재를 에이번(Avon) 지류인 스위프트 강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종교개혁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오히려 타올랐다. 영국교회 역사학자인 토마스 풀러(Thomas Fuller, 1608-1661)는 위클리프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그들이 위클리프의 뼈를 불살라 시내의 급류에 던져버렸다. 그 던진 뼈의 재 가루는 아본 강으로, 아본 강은 그것을 세버른 강으로, 세버른 강은 그것을 좁은 바다로, 좁은 바다는 다시 큰 대양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재가 된 그의 뼈는 이제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얀 후스, 모국어 성경과 설교가 종교개혁에 눈을 뜨게 하다.

 

체코, 프라하 하면 가장 먼저 체코의 작곡가 스메타나가 지은 “나의 조국”을 기억하게 된다. 프라하로 흐르는 몰다우 강변에 우뚝 선 체코의 옛 성 이름을 따 지은 “나의 조국”은 보헤미아의 국토와 역사, 민족적인 색체를 담고 있다. “프라하의 봄(혁명, 1968)”때도 “나의 조국”의 찬가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몰다우 강을 가로지르는 500미터의 카를교(Charles Bridge)에서 바라보는 “높은 성(나의 조국)”은 프라하의 눈동자로 꼽힌다. 이곳에서 얀 후스(1372-1415)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개혁의 불을 댕겼다. 그는 보헤미아(체코)인을 위해 라틴어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여 모국어로 설교했다. 그는 “면죄부를 파는 교황은 가룟 유다와 같다.”라고 서슴지 않고 선언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황이나 교회가 최고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성경이 유일한 신앙의 권위라는 사실을 선포하며 교황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즈음 교황은 개혁의 물결이 유럽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스를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했다.

1414년 11월 3일 후스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친 채 당시 신성로마제국 지그문트 황제가 신변을 보장하겠다는 말만 믿고 공의회에 참석했지만 어이없이 수도원의 지하 감옥에 투옥되고 말았다. 그는 교황을 비판한 것에 대해 철회하고 용서를 빌라는 요구를 기꺼이 거부했고, 이듬해인 1415년 7월 6일 화형 당했다. 그의 고백에서 그의 확고한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지키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배우라, 죽기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그것은 진리가 죄와 악마와 영혼의 죽음과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케하기 때문이다.” 후스는 29살에 프라하대학 철학부 학장, 37살에 총장이 되어 황제와 영주 편에서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진리 편에 서서 “산 제물”로 자신을 바쳤다.

 

“후스”란 체코말로 “거위”란 뜻으로, 그가 화형당할 때에 “너희가 지금 거위를 불태워 죽이지만 100년 뒤 나타난 백조는 어쩌지 못할 것”이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에 역사가들은 훗날 루터의 등장과 종교개혁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 누구도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의 성공이 얀 후스가 뿌린 열매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당시 루터는 공공연하게 후스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이 아예 후스의 후예라고 자처했다. 루터는 1519년 유명한 라이프치히에서 요하네스 엑크와 논쟁을 벌일 때도 후스의 글들을 인용하여 후스의 개혁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사보나롤라, 수도원과 민중들이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게 하다.

 

이탈리아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가 자신의 전성기를 바쳤으며, “신곡”을 쓴 단테와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도 이곳에서 활동했다. 피렌체는 정치적으로 나폴리, 밀라노, 플로랜스, 베니스 등, 도시국가들 가운데 중심도시로 그 영향력이 매우 컸다. 사보나롤라(1452-1498)는 마르틴 루터가 출생하기 31년 전 페라라에서 출생한 이후 수도사로, 내면적으로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의 갱신을 촉구하였고, 외적으로는 피렌체 시를 개혁하고, 공화주의 사상과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다. 사보나롤라는 당시 어두운 중세를 비추는 떠오르는 샛별이었고, 그의 설교를 듣고자 하는 민중들은 거리를 꽉 매웠다. 민중들은 그가 제시한 개혁의 방향에 대해 환호를 보냈고, 특히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에 사보나롤라가 평민들과 함께 그들을 용감하게 물리쳤을 때 최고 절정에 달했다.

 

그의 설교 대부분은 예언적인 것으로 교황청을 향했다. 교황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성직을 매매하는 자, 각종 사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라고 공격하였다. 이런 까닭에 교황 알렉산더 6세(재위 1492-1503)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알렉산더 6세는 그를 위협하면서 설득했지만 불응하자 설교 금지는 물론 이단자로 파문하여 화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에 대한 로마교회의 결정사항은 다음과 같다. “사보나롤라가 또 다른 세례 요한일지라도 사형에 처한다.” 1498년 5월 23일 사보나롤라는 그를 따르던 두 명의 수도사와 함께 옷과 신발이 벗기고 손이 묶여진 채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유골은 겨우 재 가루만 남겨져 아르논(Arnon)강에 뿌려졌다. 사보나롤라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역사는 그를 오래토록 기억하고 있다. “위대한 설교가”, “개혁자”, “순교자”, “종교 지도자와 전제군주 통치에 맞서 저항한 투사”, 역사는 그에게 많은 영예로운 이름들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정치선동가”라는 일부의 곱지 않은 비판도 따랐다.

 

1521년 카를 5세가 소집한 독일 보름스 회의(Worms)가 열린 그곳에 지금은 종교개혁 기념동상이 서 있다. 루터의 동상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쪽에 네 사람이 앉아 있다. 왼쪽에서 사보나롤라, 얀 후스, 위클리프, 발데스 동상이 있다. 바깥 둘레에는 루터를 후원했던 프리드리히 선제후, 종교개혁의 동지인 멜란히톤 동상이 서 있다. 이들 모두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에 힘입어 종교개혁에 헌신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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