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의 작가 반 고흐, 수련의 작가 모네, 사과의 작가 폴 세잔

한국에서 진달래꽃을 말할 때에 가장 먼저 김소월을 기억하게 된다. 그에 비해 유럽에서 여름의 꽃, 해바라기를 떠올릴 때에 인상주의 화가이자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린 화가로 알려진 반 고흐를 기억하게 된다. 또한 모네라는 이름에서 수련을 떠올리게 되며, 그리고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세잔에서 사과를 떠올리게 된다.

 

반 고흐, “해바라기는 나의 고뇌이다.”

 

해바라기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꽃이다. 반 고흐는 대략 2000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 가운데 “드브레 정원의 해바라기”, “해바라기가 있는 헛간”, “해바라기가 있는 시민농장”, “해바라기 정물화 연작” 등 해바라기를 주제로 한 그림이 11점이 된다. 세잔이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하겠다.”라며 자신만의 독특한 사과를 그리고 또 그렸듯이, 고흐는 해바라기 하나로 자신만의 화법을 창조해냈다. 고흐에게 해바라기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해바라기는 그의 고향마을의 교회당 주변에 이미 둘러싸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 중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해바라기 작품은 바로 “꽃병에 꽂인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란 그림이다. 이것은 훗날 고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고흐는 한여름 내내 그 뜨거운 태양을 향하여 묵묵히 서 있는 해바라기가 대견스럽게 보였다. 태양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해바라기는 더욱 활기찼고 반면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면 고개를 땅으로 숙여 한없이 태양을 기다렸다. 그는 꽃에 알알이 맺힌 해바라기 씨앗들이 태양으로 잉태된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해바라기 꽃은 인내와 희망의 상징이자, 기쁨과 행복의 상징이었다.

고흐는 친구이자 자신의 경쟁자인 고갱에게 편지를 썼다. “자네에게는 모란이 있고, 쿠스트에게는 접시꽃이 있듯이, 나는 해바라기를 택했다.” 이에 대해 고갱은 고흐에게 “당신은 해바라기 화가”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고갱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고흐는 1888년 8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 “나는 오직 커다란 해바라기로만 집을 꾸미고 싶다.”라고 썼다. 반 고흐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을 팔지 못했지만, 그의 사후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해바라기가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해바라기 꽃이 상징하는 바를 밝히려 애를 썼다. 전통적으로 해바라기는 인간의 신에 대한 열망 내지, 소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 고흐는 자신이 쓴 편지 중에 현존하는 편지 37통에서 해바라기에 대한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단 한 번밖에 언급하지 않았다. “해바라기는 나의 고뇌와 울부짖음과 같다.” 이것이 해바라기에 대한 그의 유일한 표현이었다. 국어사전에 해바라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해바라기는 어린 시기에만 해를 따라서 동서로 움직이지만 꽃이 피고 줄기가 굵어지면 몸을 돌리는 일이 없다.” 반 고흐는 태어나면서부터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성장하고 열매를 맺지만 결국 해에 의해 꺾이고 죽고 마는 것을 보고 자랐다. 고흐는 “태양을 훔친 작가”로 태양의 위대함을 해바라기에 담았지만 해바라기가 남긴 열매가 아닌, 해를 바라보고 멈추어 버린 해바라기 작가로 남게 되었다.

 

클로드 모네, “수련이 나의 얼굴을 들게 했다.”

 

고흐에게 해바라기가 있다면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에게는 “수련”(Waterlilies)이 있다. 수련은 빛의 화가로 불리는 모네의 사랑이었다. “돌연 마법처럼 내 연못이 깨어났다. 난 홀린 듯 팔레트와 붓을 잡았고, 다시는 그보다 더 멋진 모델을 만날 수 없었다.” 그 유명한 “수련” 연작을 남긴 “빛의 화가”, 프랑스의 인상주의 미술가 모네가 남긴 말이다. 예술가의 삶은 고단하다. 무엇인가 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야 하는 모네의 삶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순탄치 못한 결혼, 극심한 가난, 아내의 죽음 등은 젊은 시절의 모네를 몹시 힘들게 했다. 모네가 가장 힘든 시기에 “수련” 연작이 그를 위대한 작가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모네는 86년의 긴 생애 중, 마지막 30년을 수련 연작에 바쳤다. 젊은 시절 거처를 옮겨 떠돌다가 43세 때에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집 한 채를 장만했다. 그 집이 바로 지금의 “클로드 모네 미술관”이다. 그는 꽃을 심고 다리를 놓고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은 후에 마침내 그림을 그렸다. 모네가 남긴 2,000여 점의 유화 중 지베르니에서 그린 것이 350여 점, 그 중 200여 점이 수련인 것을 보면 모네가 얼마나 “수련” 연작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다.

 

모네는 평론가 제프루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물과 그 위에 반사되는 풍경은 이 늙은이의 힘을 뛰어 넘어 하나의 집착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느끼는 것을 그리고 싶다.”라고 열망을 토로 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작가의 정신을 보였다. “수련” 연작은 그가 평생 추구한 빛과 색채의 철학을 집약한 것인 동시에 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수련은 그에게 단순히 물 위에 떠 있는 꽃이 아니라 태양빛이 강렬하게 솟아오를 때 물속에서 도도하게 올라와 화사하게 피어나는 자신이었다. 그러나 수련은 햇빛이 조금이라도 사라지기만 하면 곧바로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수련이 얼굴을 내밀 때에 모네는 얼굴을 들 수 있었고, 해가 들어가 수련이 얼굴을 감출 때에 모네 역시 얼굴을 감추인 것을 보면 수련은 모네의 전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폴 세잔, “사과가 나에게 파리를 정복하게 했다.”

 

과일하면 사과가 가장 먼저 연상된다. 또한 사과 하면, 아담의 사과,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사과,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명중시킨 빌헬름 텔의 사과,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뉴턴의 만유인력에서의 사과, 백설공주의 사과,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애플까지 참으로 많다. 그런데 빼놓을 수 없는 사과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이 그린 “사과”이다. 프랑스의 인상파의 화가 폴 세잔은 사과 하나로 유명한 화가가 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폴 세잔과 동시대 화가였던 모리스 드니(Dneis, Maurice)는 “세계 역사상 유명한 사과 세 개가 있다. 아담과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폴 세잔의 사과이다.” 아울러 그는 “보통 화가의 사과는 먹고 싶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라고 말했다. 세잔이 그의 친구 에밀 졸라로부터 사과 한 개를 선물로 받은 이후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하겠다.”라고 다짐하면서 사과를 그리고 또 그렸다. 반면 에밀 졸라는 훗날 소설가가 되었고, 서로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에밀 졸라가 소설 “작품”(1886)을 발표하면서 오랜 우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세잔은 소설의 주인공 “실패한 천재화가”가 바로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완전히 결별을 하였다. 결국 세잔은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하고, 근대 미술사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친구와 절연을 하게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세잔이 그린 사과는 이후 피카소를 단번에 유명하게 만든 입체파의 길을 닦아놓았다. 파블로 피카소는 세잔을 두고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라고 했다.

 

세잔은 정물화 중에서도 사과에 집중했고, 사과를 그리기 위해서 싱싱한 사과가 썩을 때까지 꾸준히 지켜보며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단순한 빨간 사과가 아닌, 사과 본연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선택과 집중, 차별화를 시도함으로 파리를 정복했다. 세잔은 근대의 미술 감상자들과 후대 화가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다. 이런 역할을 가장 잘 해낸 그림이 바로 “사과”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서도 세잔의 과일 정물화가 두 점이나 들어 있다. 세잔은 오늘 현대인들에게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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