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마태복음 23 : 1 -12
한 해를 시작하는 1월을 영어로 “January”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야누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야누스는 서로 다른 두 얼굴을 가진 사람 즉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중생활을 소제로 한 많은 작품들이 있는데, 그중 로버트 스티븐슨이 쓴 “지킬박사와 하이드”란 소설이 있습니다. 지킬박사는 낮에는 천사, 밤은 하이드 악마로 변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같이 철저하게 이중적인 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이중적인 모습과 생활을 폭로하였을 뿐 아니라, 7차례에 걸쳐 책망하였습니다. 오늘은 “버려야 할 그리스도인의 이중생활”이란 제목으로, 우리의 모습은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 남을 가르쳤지만, 자신은 행하지 않았다.
(2절)“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율법 교사를 의미합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일을 전담하였습니다. (마2:4) 예수님 출생 당시 헤롯이 서기관들을 불러 별의 정체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3절)“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행하지 않은 “언행의 불일치” 즉, 이중적인 태도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롬2:21-23)“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서 이들의 이중생활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제사장이 강도 만난 자를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한 레위인도 보았지만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도와주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실제의 삶에서 율법과 상관없이 행동하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어떤 선생님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추운 겨울 선생님은 난로불 앞에 앉아서 학생들에게 물 떠 오너라, 유리창을 닦으라, 화장실 청소해라 시키면, 아이들은 선생님의 손발이 되어 시키는 대로 모두 해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런 선생은 되지 않아야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나쁜 태도는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4절)“한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웠지만 자신은 율법이 요구하는 짐을 전혀 지지 않았습니다.
“여보! 아이들이 왜 저렇게 버릇이 없어! 당신은 집에 있으면서 뭐 했어!”, “목사님 예배당이 너무 추워 예배드리기 힘듭니다.”, “목사님 어린 아이들 때문에 시끄러워 예배를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회사의 사장님이나,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하는 이야기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남편이나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가 할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과 교회는 누구에게 명령하는 곳이 아니며, 한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곳이 아닙니다. 가정과 교회는 모두 함께 공동적인 책임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곳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두 가지 본을 보였습니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런 후(요13: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또한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행하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 남에게 책임을 지우면서 자신은 책임을 회피하는 이중적인 자세는 곧 바리새적인 태도입니다.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가르치고 행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 섬김은 받았지만, 섬기지 않았다.
(6-7)“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이뿐 아니라 (9, 10절) 그들은 아버지와 지도자라 칭함 받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 음악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시지요? 악성 베토벤은 “바흐의 음악은 크고 광활한 바다며, 그의 음악은 음악의 성서이며,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역사가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했으며, 사람들은 히포크라테스를 “의학의 아버지”로 부릅니다. 지금도 의사가 되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합니다. “나에게 의술을 가르쳐준 자를 나의 부모로 생각하며, 나는 누구에게도 극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 청렴과 숭고함으로 나의 의술을 펼치겠노라…”
바울은 (롬4:11)“아브라함은…믿는 모든 자의 조상(아버지)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산은 “하림”, 스승은 “오림”, 그리고 어버이는 “호림”이라 합니다. 성경은 스승과 아버지를 산과같이 가장 높은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는 아버지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3번이나 강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11-12절)“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대접만 받고 남을 섬기지 못하는 너희들이 선생이라고, 아버지라고 어림없는 소리다. 주님은 선생과 지도자 아버지는 섬기는 자이며 낮추는 자라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학교와 가정교육,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선생과 지도자, 어버지들이 섬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선생과 지도자, 심지어 아버지가 지위나 계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교의 영향이 큽니다. 남존여비, 장유유서 등의 사고가 교회까지 침투되어 교회의 직분까지 지위와 계급으로 인식 되어가고 있습니다.
(11-12절) “섬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섬김은 짐을 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집사”“목사”는 “섬기다”란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엡4:11)“사도와 선지자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온전케 한다.”란 의학적인 용어로, “뼈를 맞추다.”“찢어진 것을 꿰매다.” 의사가 환자를 돌보고 치료하는 것과 같이 직분자는 교회와 성도를 돌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섬김은 희생함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과 성경이 말하는 복은 다릅니다. 세상에서 복은 “Happiness”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Happen”에서 온 것으로 “ 근거 없는 일이 일어나다.”란 뜻입니다. 반면 성경에 축복은 “Blessing”인데, “Bleed”(피)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이란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희생하는 데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섬김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김으로 나타납니다. 나의 믿음은 내가 지금 섬김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섬기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시간이든지, 재능이든지, 물질이든지, 마음이든지 하나님과 교회,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믿음은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섬김을 받고 있는 동안 신앙의 지도자, 선생 그리고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섬길 때 비로소 지도자와 선생과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은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성숙되길 바랍니다.
- 밖으로 나타난 행동과 속의 마음이 달랐다.
사람은 크게 두 가지를 통해 배웁니다. 아주 잘한 것을 보고 배웁니다. “저 사람은 참 열심히 일하여 성공했구나!” 반면 잘못한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저러면 안 되는구나!” 성경은 이것을 반면교사라 말합니다.
성경에 반면교사가 많지만 가룟유다를 통해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유다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먼저 유다의 외적 모습은 11제자와 다름없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말씀을 배우고, 이적들을 경험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돈궤를 맡았습니다. 어떤 단체라도 돈을 관리하는 일은 아무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믿을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데, 유다가 돈궤를 맡았다는 것은 적어도 외관상 신임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가룟유다의 속마음은 돈에 눈이 멀어져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300데나리온 되는 값비싼 향유를 머리에 붓자 이렇게 비판합니다. (요12: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동의를 하였습니다. “유다 말이 맞아! 유다는 우리보다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커!”
그런데 현장에 함께 있었던 요한은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12: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라.”요한은 회계장부나 주변 증거를 통해 유다가 몰래 돈을 빼돌린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리아가 향유를 붓을 때도, 구제에 쓰지 않아 나무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훔쳐갈 돈이 없어져 나무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결국 스승을 은 30에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바리새인들을 반면교사로 사용하셨습니다. (5절)“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니”, (25절)“바리새인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가룟유다가 겉과 속이 다른 양면성을 가진 위선자였지만 예수님의 제자 행세를 한 것처럼 바리새인들 역시, 겉으로는 존경 받는 선생 지도자, 아버지 노릇을 했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방탕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누구나 양면성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바울도(롬7:21)“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본래 모습으로 나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이중적인 것은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행하는 일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속과 겉이 다른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가 혹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1.21
한 해를 시작하는 1월을 영어로 “January”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야누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야누스는 서로 다른 두 얼굴을 가진 사람 즉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중생활을 소제로 한 많은 작품들이 있는데, 그중 로버트 스티븐슨이 쓴 “지킬박사와 하이드”란 소설이 있습니다. 지킬박사는 낮에는 천사, 밤은 하이드 악마로 변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같이 철저하게 이중적인 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이중적인 모습과 생활을 폭로하였을 뿐 아니라, 7차례에 걸쳐 책망하였습니다. 오늘은 “버려야 할 그리스도인의 이중생활”이란 제목으로, 우리의 모습은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 남을 가르쳤지만, 자신은 행하지 않았다.
(2절)“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율법 교사를 의미합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일을 전담하였습니다. (마2:4) 예수님 출생 당시 헤롯이 서기관들을 불러 별의 정체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3절)“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행하지 않은 “언행의 불일치” 즉, 이중적인 태도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롬2:21-23)“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서 이들의 이중생활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제사장이 강도 만난 자를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한 레위인도 보았지만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도와주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실제의 삶에서 율법과 상관없이 행동하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어떤 선생님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추운 겨울 선생님은 난로불 앞에 앉아서 학생들에게 물 떠 오너라, 유리창을 닦으라, 화장실 청소해라 시키면, 아이들은 선생님의 손발이 되어 시키는 대로 모두 해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런 선생은 되지 않아야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나쁜 태도는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4절)“한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웠지만 자신은 율법이 요구하는 짐을 전혀 지지 않았습니다.
“여보! 아이들이 왜 저렇게 버릇이 없어! 당신은 집에 있으면서 뭐 했어!”, “목사님 예배당이 너무 추워 예배드리기 힘듭니다.”, “목사님 어린 아이들 때문에 시끄러워 예배를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회사의 사장님이나,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하는 이야기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남편이나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가 할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과 교회는 누구에게 명령하는 곳이 아니며, 한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곳이 아닙니다. 가정과 교회는 모두 함께 공동적인 책임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곳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두 가지 본을 보였습니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런 후(요13: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또한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행하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 남에게 책임을 지우면서 자신은 책임을 회피하는 이중적인 자세는 곧 바리새적인 태도입니다.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가르치고 행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 섬김은 받았지만, 섬기지 않았다.
(6-7)“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이뿐 아니라 (9, 10절) 그들은 아버지와 지도자라 칭함 받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 음악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시지요? 악성 베토벤은 “바흐의 음악은 크고 광활한 바다며, 그의 음악은 음악의 성서이며,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역사가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했으며, 사람들은 히포크라테스를 “의학의 아버지”로 부릅니다. 지금도 의사가 되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합니다. “나에게 의술을 가르쳐준 자를 나의 부모로 생각하며, 나는 누구에게도 극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 청렴과 숭고함으로 나의 의술을 펼치겠노라…”
바울은 (롬4:11)“아브라함은…믿는 모든 자의 조상(아버지)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산은 “하림”, 스승은 “오림”, 그리고 어버이는 “호림”이라 합니다. 성경은 스승과 아버지를 산과같이 가장 높은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는 아버지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3번이나 강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11-12절)“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대접만 받고 남을 섬기지 못하는 너희들이 선생이라고, 아버지라고 어림없는 소리다. 주님은 선생과 지도자 아버지는 섬기는 자이며 낮추는 자라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학교와 가정교육,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선생과 지도자, 어버지들이 섬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선생과 지도자, 심지어 아버지가 지위나 계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교의 영향이 큽니다. 남존여비, 장유유서 등의 사고가 교회까지 침투되어 교회의 직분까지 지위와 계급으로 인식 되어가고 있습니다.
(11-12절) “섬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섬김은 짐을 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집사”“목사”는 “섬기다”란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엡4:11)“사도와 선지자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온전케 한다.”란 의학적인 용어로, “뼈를 맞추다.”“찢어진 것을 꿰매다.” 의사가 환자를 돌보고 치료하는 것과 같이 직분자는 교회와 성도를 돌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섬김은 희생함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과 성경이 말하는 복은 다릅니다. 세상에서 복은 “Happiness”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Happen”에서 온 것으로 “ 근거 없는 일이 일어나다.”란 뜻입니다. 반면 성경에 축복은 “Blessing”인데, “Bleed”(피)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이란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희생하는 데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섬김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김으로 나타납니다. 나의 믿음은 내가 지금 섬김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섬기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시간이든지, 재능이든지, 물질이든지, 마음이든지 하나님과 교회,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믿음은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섬김을 받고 있는 동안 신앙의 지도자, 선생 그리고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섬길 때 비로소 지도자와 선생과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은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성숙되길 바랍니다.
- 밖으로 나타난 행동과 속의 마음이 달랐다.
사람은 크게 두 가지를 통해 배웁니다. 아주 잘한 것을 보고 배웁니다. “저 사람은 참 열심히 일하여 성공했구나!” 반면 잘못한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저러면 안 되는구나!” 성경은 이것을 반면교사라 말합니다.
성경에 반면교사가 많지만 가룟유다를 통해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유다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먼저 유다의 외적 모습은 11제자와 다름없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말씀을 배우고, 이적들을 경험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돈궤를 맡았습니다. 어떤 단체라도 돈을 관리하는 일은 아무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믿을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데, 유다가 돈궤를 맡았다는 것은 적어도 외관상 신임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가룟유다의 속마음은 돈에 눈이 멀어져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300데나리온 되는 값비싼 향유를 머리에 붓자 이렇게 비판합니다. (요12: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동의를 하였습니다. “유다 말이 맞아! 유다는 우리보다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커!”
그런데 현장에 함께 있었던 요한은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12: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라.”요한은 회계장부나 주변 증거를 통해 유다가 몰래 돈을 빼돌린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리아가 향유를 붓을 때도, 구제에 쓰지 않아 나무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훔쳐갈 돈이 없어져 나무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결국 스승을 은 30에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바리새인들을 반면교사로 사용하셨습니다. (5절)“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니”, (25절)“바리새인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가룟유다가 겉과 속이 다른 양면성을 가진 위선자였지만 예수님의 제자 행세를 한 것처럼 바리새인들 역시, 겉으로는 존경 받는 선생 지도자, 아버지 노릇을 했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방탕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누구나 양면성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바울도(롬7:21)“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본래 모습으로 나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이중적인 것은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행하는 일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속과 겉이 다른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가 혹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