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분열, 서로마제국의 멸망, 동로마제국의 멸망

일반적으로 로마제국은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재위 B.C.27-A.D.14)가 된 B.C. 27년부터 1453년 비잔티움제국(Byzantine Empire, 동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말한다. 로마제국이 몰락하기까지 크게 세 가지 과정을 거치게 된다. A.D.395년 동서 로마제국의 분열,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 그리고 1453년 비잔티움제국의 멸망으로 로마제국은 끝을 맺는다.

 

  1. D. 395, 로마제국의 분할통치가 분열로 이어지다.

 

B.C. 753년, 도시국가에서 시작된 로마는 왕정(B.C.753-B.C.509)과 공화정(B.C.510-B.C.27)을 통해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쥐고 있던 카르타고(B.C.146)를 손에 넣고 지중해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공화정으로는 지중해 밖으로 넓혀진 새로운 영토를 관리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군 통수권과 권력을 가진 독재관(Dictator)과 군사령관의 지위를 주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하였으나 그가 암살당하므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암살사건은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황제)시대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로마 원로원은 이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주었고, 그 칭호는 그가 로마 초대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지렛대 역할을 했다. 이후 로마 정치체제는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제정(황제)시대가 존속되었다.

 

로마제국의 분열의 단초는 가장 강력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로마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는 내부적으로 분열을 막고, 외부적으로 유럽으로 진출해 오려는 페르시아와 이슬람의 세력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로 판단하여 수도를 옮겼지만 종교적인 정통성까지는 옮겨가지 못했다. 오히려 종교적인 정통성은 로마에 있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인 중심이 되었다. 이후 로마교회와 비잔티움 황제들 간에 서로 종교와 정치적인 입장을 달리하면서 분열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재위 379-395)때는 넓혀진 땅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로마제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자신의 두 아들에게 맡겼다. 그것은 곧 동서로마가 분리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서로마제국은 동로마에 비해 허약한 경제와 내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군대로 동로마보다 넓은 국경을 방위해야만 하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찍이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동서 로마제국을 함께 통치한 마지막 황제로, 395년 그가 죽은 후 동서 로마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어 다시 통일되지 못했다. 분할 통치는 분열로 이어지고 말았다.

 

  1. D. 476, 포용정책으로 지탱한 서로마, 포용정책으로 멸망하다.

 

“지성은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은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은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진 로마가 어떻게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로마인 이야기” 15권을 집필한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가 그의 책 1권 서문에서 던진 질문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질문에 대하여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가 찾은 해답은 “로마의 개방성(포용성)”이라고 했다. 로마제국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은 이미 답을 내놓은 상태다. “로마는 노예나 이방인, 심지어 적까지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든 개방성(포용성)이 로마제국을 만들게 했고 또한 개방성이 제국을 멸망하게도 했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재위 475-476)는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한다. 서로마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의 아들에게 동서 로마제국을 분리 통치하게 한 지 겨우 81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다.

세계사에서 서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은 훈족(흉노적)의 침입과 게르만 민족의 침입(대이동)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413-426)에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이란 책을 집필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동일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가 “신의 도성”을 집필한 배경은 410년 로마의 함락으로부터 시작된다. 410년 8월24일, 고트족이 800여 년 동안 한 번도 공격받지 않았던 로마를 단 삼일 만에 함락시켰을 때에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해 가장 예민한 사람은 바로 이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제국의 멸망을 제국의 국교였던 기독교에서 찾았다. 그들은 제국이 가장 무력해진 시기가 기독교가 가장 번성한 시기였다는 점을 주목했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이교도들의 비난에 대해 변명하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와 이교도들 모두에게 바른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로마함락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는 이교도들과 그 비난이 무서워 변명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마가 멸망하게 된 원인은 로마의 부도덕성과 무 신앙에서 왔지만 오직 하나님의 도성만이 영원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로마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미덕을 발휘할 때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1. D. 1453, 1000년의 유산을 남기고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다.

 

독일의 법학자 예링(1818-1892)은 그의 저서 “로마법의 정신” 첫머리에서 로마가 천년이란 긴 세월동안 세계를 지배한 사실에 대하여 이같이 기록하고 있다. “로마는 세 번 세계를 통일하였다. 첫 번째는 무력에 의하여 국가를 통일하였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교로써 교회를 통일하였고, 세 번째는 로마법으로 세계를 통일하였다.” 그런데 그 천년의 긴 세월도 종말을 고하는 날이 왔다. 바로 1453년 5월29일, 오스만제국이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였다. 오스만 튀르크의 제7대 술탄 메흐메트 2세(1432-1481)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이스탄불이라 명명했다. 비잔티움제국은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동서로마가 분할된 이후부터 1453년까지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약 90여명의 황제와 125명에 이르는 대주교가 지배했다.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게 점령당해 느린 속도로 문명화되는 동안에 비잔티움제국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오롯이 보존하고 발전시켰다. 그 결과 비잔티움제국은 대체로 로마제국의 고전적 전통을 따랐고, 정치제도는 로마의 이념과 철학을 이어받았고 종교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다. 예술에서는 비잔틴 양식을 확립하였으며 언어와 문화와 생활은 그리스의 전통을 많이 따랐다.

 

비잔티움제국은 두 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 훈족과 게르만족의 침입과, 기독교의 진리를 훼손하는 이단과 싸움이었다. 특히 이단으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해 니케아공회의(325), 칼케돈공회의(451)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확립시켰다. 무엇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천도한 것에서 볼 수 있었듯이 콘스탄티노플은 군사적으로 서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감당해 왔다. 즉 비잔티움제국의 멸망은 서유럽입장에서 볼 때에 방파제가 무느진 것과 다름없었다. 또한 비잔티움제국은 수백 년 동안 그리스의 철학과 문화, 로마의 법과 문명 그리고 기독교의 전통을 다듬고 보존해서 유럽에 전해 주었다. 그럼에도 유럽은 제4차 십자군원정(1202-1204)을 결성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약탈과 패륜을 저질렀다. 참으로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유럽은 한동안 동로마제국으로부터 불신과 이슬람 세력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은 로마의 법과 그리스의 철학, 기독교가 완벽하게 결실한 곳이라 할 만하다. 로마교회와 개신교회, 희랍정교회와 이슬람교의 네 종교는 모두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뿌리를 두고 각기 지중해로 뻗어 나갔다. 로마가 인류역사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랑케(1795-1886)의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 “고대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호수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