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5일 주일 설교 : 우리가 함께 일할 때, 기억할 것

성경 : 빌립보서 2 : 12 – 18  /  2017. 1.15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가장 큰 두 가지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프로와 아마추어는 1퍼센트의 차이다.” 1%의 차이는 마치 물의 온도 섭씨 100도와 99도의 차이와 같은데, 1도는 물과 수증기의 차이다.

둘째, “프로는 불을 피우고, 아마추어는 불을 쬐는 차이다.” 즉, 프로는 불을 피우는 이유와 목적을 알지만 아마추어는 누가 왜 불을 피웠는지 모르고 그냥 불을 쬔다. 사소한 차이지만 결과는 아주 큽니다. 오늘은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교훈한 말씀으로, “우리가 함께 일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란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 동일하게 행하라.

“빌 하이벨스”의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읽어 보지 않았지만, 제목만 보아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때 잘하려고 하지만, 사람이 없으면 대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구세군에서 전국적으로 자선 남비를 설치하는데, 구세군에서 돈을 가장 많이 넣은 경우와 가장 적은 경우를 발표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돈을 많이 기부한 곳은 백화점과 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며, 가장 적은 곳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12절)“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사람이 보거나 보지 않거나 상관하지 말고, 한결같이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는 봉사나 선행이 나쁘다거나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행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 불신앙을 지적한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함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한 평생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삼상12:3)“내가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여기 “하나님 앞에서” 라틴어로 “코람데오”란 뜻으로, 제가 다닌 신학교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하나님 앞에서”란 교훈을 기억하며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칠 때도 교수가 없었습니다. 식당에서 식권을 판매할 때도 스스로 돈을 내고 구입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의를 주장할 때 이렇게 합니다. “내 양심을 걸고 말하지만…” “부모님의 이름을 걸고”, “하늘을 두고 말하지만…”, 한국 대통령은 “헌법”에 손을 얻고 서약을 하며 미국은 “성경”에 손을 얻고 서약합니다. 그리고 우리 직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약을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재판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 (행4:19)“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람이 볼 때와 보지 않을 때를 구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셨고, 우리 모두에게 “증인이 되라.”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디는“경건이란 당신이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모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노출과 자기 자랑과 선전이 미덕처럼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6:4)“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1. 소원을 갖고 행하라.

사람은 누구나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동, 서양, 남녀노소, 과거와 현재의 사람이건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에는 소원을 가진 사람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했을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의 한 가지 소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꿈에 나타나 (왕상3:5)“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했을 때에 솔로몬은 곧바로 “지혜를 구하였고”, 하나님은 솔로몬의 소원을 응답해 주었습니다. 한나의 소원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한나는 끝임 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예수님도 소원을 가지고 계셨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히5: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도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소원을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3-14)“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우리가 열망하는 것과 소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이루길 바라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소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37:4)“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내가 기뻐하는 소원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는 소원을 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원하는 소원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소원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평소 한 가지 소원을 갖고 기도하였습니다. (시27:4)“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란 “성전을 짓고 싶다.”란 뜻입니다. 즉 다윗의 소원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소원을 거절하였습니다. (대상28:3)“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라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소원을 아들을 통해 이루게 하셨습니다. (삼하 7:12-13)“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는 소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소원을 통해, 나의 소원을 성취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1.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하라.

(14절)“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유는 (16절)“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일반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나, 피해의식을 가질 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의 삶에 대하여 “육에 속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광야 40년 삶이 원망과 불평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망한 이유를 보면(민11:5-6)“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그들이 원망한 이유가 아주 육신적인 소욕 때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출애굽 1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시체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이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고전10:10-11)“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지난 한 주간을 돌이켜보면 감사보다 원망과 불평이 많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극복하는 방법은 자족하는 삶입니다. (고전7: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우리가 “이것 없으면 절대 안 돼, 살 수 없어”라고 절대화시키면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그보다 우리는 “그것 없어도 괜찮아”라고 상대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상대화시킬 때 역경 중에도 일어설 수 있게 되며 적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는 방법입니다. 누가는(눅4:25-27)하나님이 엘리야시대 흉년 중 많은 과부 중 사렙다 한 과부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엘리사 때 이스라엘의 많은 문둥병자 중에 나아만 한 사람만 고쳐 주었음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7장, 나인성 과부 독자가 죽었을 때 주님은 그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절망감에 빠졌을 때 남편과 두 아들을 살려주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직접 살리시기도 하지만, 반면 다른 수많은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유혹합니다. “내가 새벽마다 기도하는데, 어려움을 내 버려두시는가?” “하나님은 왜 교회를 충성하는 성도의 가정에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지 않는가?”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거나 섭섭한 감정을 갖도록 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할 때,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될 때에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 것을 기억할 때 원망과 시비를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함께 일하는 자와 기뻐할 수 있길 바라며, 모든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