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이라. 2016.10.23.
오늘 본문을 위해 말라기의 배경을 조금 설명하겠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이후 이스라엘은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북쪽을 “이스라엘”이라 했고, 남쪽을 “유다”라 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게 망했고, 남 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지금의 이라크)에게 망했습니다. 그런 후에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70년 후 페르시아(이란, 바사)가 바벨론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을 자기 고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때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모두 42,360명이었으며,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대 제사장 여호수아였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가장 먼저 무너졌던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변 사마리아 사람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전 재건하는 일을 방해하자, 성전 재건이 거의 중단되었습니다. 성전 재건이 16년간 방치된 것을 보고“성전 재건을 게을리 하느냐?”라고 책망하며 독려한 두 선지자가 있었는데,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입니다.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로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공사가 중단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이 식어져 있었습니다. “예배에 대한 뜨거움”이 사라지고 “형식적인 예배”로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믿음의 활기를 불어 넣고, 열정을 갖도록 한 사람이 바로 “말라기” 선지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말라기는 우리에게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라.
말라기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외쳤을 때, 그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 조상이 왜 포로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답변이 무엇입니까?(2-3절)“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야곱의 백성인 너희들은 여러 가지 시험도 있었고, 포로가 되긴 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지 않았느냐? 여전히 보호 가운데 있지 않느냐? 반면 에서는 어떻게 되었느냐? 에서의 후손들은 잘 되는 것 같았지만, 황폐되지 않았느냐?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취미도, 열심도, 약속도, 가치관도 심지어 믿음도 변합니다. 욥의 믿음도 처음 순전했지만 고난 가운데서 약해졌습니다. 다윗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칭찬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은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첫 아기를 얻었을 때 얼마나 예뻐 보였습니까? 그러다가 자식이 짐이구나, 원수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 열심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게 됐지?”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누가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지 하십니까? 바울, 아볼로, 디모데, 사도요한이 목회 했던 곳입니다. 훌륭한 목회자를 통해 말씀을 배웠기에 “악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했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가장 먼저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다윗은 침체에 빠졌을 때 무엇을 위해 기도했습니까? (시51: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며, 자원된 마음을 회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고전13:2-3)“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사랑을 회복하여 뜨거움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회복하라.
(6절)“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에게 큰 병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원망입니다. 내 신앙이 무너져 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감사는 사라지고, 원망”이 나올 때입니다. 나에게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것은 곧 신앙이 무너져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암5:6)“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성경은 하나님 공경을 예배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배의 교과서입니다. 창세기는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그의 백성들을 자유롭게 예배하기 위해 출애굽 시킨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예배드리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가서는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므로 바벨론에게 망한 이야기와 예배를 회복하여 축복 받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불러서 구원하신 이유도 예배드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혹 우리가 출타를 한다든지, 여행을 하다든지 할지라도 예배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의 인생은 예배로 시작하여 예배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출생하면 출생 예배를 드립니다. 백일과 돌 예배를 드립니다. 학교를 입학하면 입학 예배, 졸업하면 졸업예배, 개업하면 개업 예배를 드립니다. 취직하면 취직 감사예배, 60이면 회갑 예배, 돌아가시기 전에 임종 예배, 죽어 관에 넣을 때 입관예배, 땅에 묻을 때 하관예배, 이렇게 하여 일생을 끝냅니다.
또 일 년 지나면 추도 예배를 드립니다. 죽고 나서도 그 사람 때문에 예배가 계속 이어집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서도 계속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평생이 아니라 영원히 드려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배 생활이 흔들리면 신앙생활 전체가 흔들립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아주 열심히 봉사하거나 혹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들이 그의 어머니에게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기 싫은 세 가지 이유를 말하였습니다. 첫째 주일 아침은 늦잠을 자고 싶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서 싫습니다. 셋째 성가대의 불협화음이 싫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예배를 드려야 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다. 둘째, 예배는 사람과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이기 때문이다. 셋째, 네가 잘 되기 위해서다.”
예배가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두려운 마음이 능력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믿음이 견고해 지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 교만한 마음이 겸손으로, 낙심된 마음이 소망의 마음을 갖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시대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 교회모습과 비슷합니다. 1970-80년대 한국교회는 교회 건축 붐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세계 10대 큰 교회가 한국에 모여 있었습니다. 1970,1980년대 한국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는지 모릅니다. 밤하늘에 십자가가 한국의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런데 30-40년이 지난 지금은 아름답게 지은 건물이 비워져 가고 있으며, 특히 성도들의 뜨거운 신앙의 열기는 식어졌습니다. 식은 가슴, 냉랭한 가슴이 되었습니다. 외적인 것은 갖추어져 있는데, 신앙의 불은 꺼져가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우리에게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식은 가슴을 다시 뜨겁게 회복하게 합니다. 예배를 회복합시다.
- 거룩한 삶을 회복하라.
(7절)“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성경의 주제는 “거룩한 삶”입니다. (레19:2)“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은 “구별”을 말합니다. “죄로부터 분리”가 거룩입니다.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의 표식이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표식은 할례의식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할례가 신약에 세례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골2:11-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세례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기 전 믿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아가 “구별 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기 백성들에게 구별된 삶을 살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크고 작은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세속의 바람이 교회로 불고 있으며, 인터넷의 바람이 가정에 불어와 자녀들의 정신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바다에 부는 바람은 파도를 일으켜 배가 침몰되지만, 그 바람이 가정에서 불면 가정이 깨어집니다. 그러나 사람이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풍차는 바람이 셀수록 더 세게 돌아가며, 풍차는 바람이 세게 불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냅니다. 스페인이 낳은 유명한 소설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지은 “돈 키호테”의 무대인 “깜포 데 크립타나” 언덕 위에는 지금도 10여 개의 풍차가 있습니다. 풍차는 바람으로 돌아가는 기구로, 방아를 찡긋 전기를 만들어 냅니다.
풍차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메시지는 역경이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풍차신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롬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의 바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풍차라고 하는 걸작품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뜨거운 숯불도 가만히 두면 점점 식어지듯, 우리의 믿음도 가만히 두면 식어지게 됩니다. “말세에..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지금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지금 내가 회복할 것이 무엇인가? 를 점검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사랑과 예배, 거룩한 삶을 회복하여 우리의 믿음을 다시 불붙여, 능력 있게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