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8일 제목 : 바리새적인 태도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성경 : 누가복음 11 : 37-44 / 제목 : 바리새적인 태도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8. 28

“스티븐슨(Stevens, 1886)”이 쓴 “지킬과 하이드”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두 마음을 잘 표현해 주는 유명한 책입니다. 평소에 지킬 박사는 이웃에게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웃을 돕고, 자선사업을 하는 등 칭찬을 받았으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킬 박사에게는 또 다른 “하이드” 라는 나쁜 사람의 마음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선하고 착한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밤이 되면 온갖 못된 짓만 골라 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바리새인 같다.”라고 하면, 그것은 “이중인격자”라는 의미를 뜻합니다. 오늘 본문 예수님께서 여섯 번에 걸쳐 “바리새인이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처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수하게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겉으로는 의로운 척 하면서, 속으로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바리새인을 아주 크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책망보다 “저주”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바리새적인 요소를 완강히 거부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바리새적인 태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겉과 속이 다르면, 타인에게 인증 받을 수 없다.

우리말에 “구밀복검”(口蜜腹劍)이란 말이 있습니다. “입에는 꿀을 바르고 마음에는 칼을 품고 있다.” 즉, 앞에서는 칭찬하는 척하지만, 돌아서서 헐뜯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39절)“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국어사전에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위선”이라 말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하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너희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눅18:11-12)“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은 기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의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그보다 세리를 무시하고, 정죄했습니다.

 

구약의 아모스 선지자는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지적하였습니다. (암2:6)“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신 한 켤레로 사람을 팔고 샀습니다.

 

이렇게 신 한 켤레로 노예로 팔고 산돈을 가지고 흥청망청 즐겼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아모스는 (암6:23-24)“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 사람을 팔고 사고, 인권을 유린한 돈으로 즐기고 먹고 마시면서 예배하여 찬송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모두 집어 치워라” 한 것입니다.

 

영국에서 넬슨 제독은 한국에서 이순신 장군과 같은 사람입니다. 넬슨 장군은 1805년10월21일 스페인 남부해안,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스페인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연합군을 격침하여 승리하므로 영국인에게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노예를 팔고 사는 것을 찬성하였습니다.

 

그것은 국가수입 1/3이 노예무역을 통해 얻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교회도 노예를 팔고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이고 큰 죄인가를 알고 있었지만 노예제도에 대해 찬성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영국교회와 성도들은 매주일 교회 나가서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상화 목사가 지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3가지 이유란 책에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자기중심적이어서 가기 싫다.” “성도들이 사랑을 말하면서 서로 질투하고 싸워서 가기 싫다.”, “목회자가 진리를 외치지만 신뢰할 수 없다.”

 

칠레는 남북 길이가 4,300KM에 달하는 나라로, 2006년 칠레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습니다. 바첼렛 대통령입니다. 첫 대통령 임기를 끝내고, 4년 쉬었다가 또 대통령에 출마하여 두 번째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녀는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허물을 숨기지 않고 정면 돌파하였습니다. “나는 여성으로 이혼도 했고, 사회주의자이며, 무신론자이다. 칠레가 죄라고 생각하는 모든 죄를 다 가지고 있으며, 나는 죄의 종합선물세트다.” 유권들은 그녀의 솔직함에 표를 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만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돈과 명예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을 때, 솔직할 때”입니다.

 

  1. 지위와 신분으로는, 타인에게 존경을 받을 수 없다.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사회적인 배경을 가지고 높은 자리 않기를 좋아했습니다. (43절)“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그러기에 세례요한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마3: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거기에다 (44절)“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마23:27)“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무덤 위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무덤 안은 썩어 냄새 나는 시체가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지만, 그들의 속은 부정과 부패로 가득 찬 것을 말합니다.

 

한국사회도 유대사회와 매우 흡사한 면이 많습니다. 우선, 혈연과 지연을 따지기 좋아합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이 처음 만나면, 대략 몇 가지로 대화를 합니다. 고향이 어디입니까? 학교는 어디 나왔습니다. 어느 교회 나갔습니까? 더 가까우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고 나면 “형님, 동생, 언니, 동생”, “선배, 후배”로 명칭으로 바뀝니다.

혈연 사회는 좋을 때는 참으로 좋습니다. 돈도 빌려주고, 식사도 초대합니다. 그러나 잘못이 있을 때, 고치기가 힘이 듭니다. 회사에 조카가 사장이고, 직원인 삼촌이 설령 부정을 해도 쫓아내기 힘듭니다. 그리고 “삼촌인 나를 어찌하겠는가?”

 

둘째, 신분과 직위, 지위, 그리고 서열을 중시합니다. 자기 신분을 통해서 존경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즉, 신분과 지위만큼 자신이 높고, 존경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만큼 “회장”, “사장” “대표”란 이름이 많은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첫째, “남을 정죄하면서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데려와 정죄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에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심에 가책을 느껴 모두 돌아갔습니다.

둘째, “남에게 회개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회개하지 않는다.” 셋째, “남에게 율법을 가르치면서 자신에게는 율법을 적용하지 않는다.” (롬2:21-23)“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하는 네가 도적질 하며, 간음하느냐”

 

주님은 자신이 가진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존경과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친히 낮아져, 제자들의 발을 씻겼고, 친히 십자가에 몸을 찢어, 저와 여러분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는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함이며, 대통령은 임시직이지만, 교사직은 평생직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주일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대통령을 그만 둔 후에도 주일학교 교사직을 계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도 고귀한 이름과 직분과 신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름과 신분만으로 가치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함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게 됩니다. 말과 생각이 일치 되는 삶을 살도록 힘쓰는 성도들이 됩시다.

  1. 책임을 지지 않으면, 타인이 힘들어진다.

(46절)“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여기 짐이란 지키기 바리새인들은 수백 가지 지키기 어려운 율법을 만들어 율법에 얽매이도록 짐을 지웠습니다.

 

(마9:14절)“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금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금식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기준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 신앙의 잣대로 타인의 신앙을 과소평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신앙을 중심해서 왜 “목사가 왜 이렇게 하지?”, “왜 기도하고 찬양할 때, 손을 흔들고 크게 소리 지르지?” 함께 신앙 생활하다보면 서로 다른 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유목민들에게 낙타와 당나귀는 아주 중요한 교통수단입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나귀는 자기가 지고 갈 짐을 스스로 조정하는 반면, 낙타는 하루가 시작되면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짐을 올려주길 기다리며, 주인이 실어 주는 짐을 불평 없이 지고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낙타는 처음부터 양처럼 순순히 짐을 지고 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 낙타가 운다.”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낙타도 눈물을 흘리는데, 낙타가 극적으로 감동을 받았을 때 눈물방울을 뚝뚝 흘린다고 합니다. 몽골 여자 감독이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 실제로 낙타가 눈물 흘리는 것을 불 수 있습니다.

낙타들은 불모지에서 살기에 성질이 아주 사납다고 합니다. 특히 새끼를 낳았을 때 가장 사나운데, 새끼를 낳고서도 돌보지 않고, 일부러 새끼들에게 젖을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몽골 사람들은 비정하고 난폭한 낙타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부족 사람들이 모여 낙타를 위해 음악회를 열어 준다는 것입니다.

 

음악회 때 악기는 그들이 사용하는 현악기 “마두금”이란 악기를 사용하며, 노래는 그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로, 자식과 손자, 손녀를 키워본 할머니가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마두금” 연주와 함께 할머니의 구슬픈 노래를 들으면 그때 낙타 눈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린 낙타는 모성애를 되찾아 그때부터 새끼에게 젖을 물리며, 양과 같이 온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감동”이란 “느낌으로 움직인다.”란 뜻입니다. “느낄 때” 감동을 받습니다. 말 못하는 낙타지만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온 할머니의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감동을 받습니까? 내가 느끼고 깨달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느끼고 깨달을 때 감동을 받게 됩니다.

 

속과 겉이 다를 때, 말과 행동이 다를 때, 이름만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맡은 일을 잘 감당하므로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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