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1일(주일)설교제목 : 내 이웃이 누구인가?

 

성경 : 누가복음 10 : 25-37 / 제목 : 내 이웃이 누구인가? 2016. 8. 21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옷까지 벗겨지고,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가장 먼저 본 사람이 제사장이었지만, 그는 피하여 그냥 지나갔습니다. 다음으로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 역시 피해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 그를 보고 치료는 물론, 자신의 나귀에 태워 주막에까지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하며, 모든 비용까지 지불했습니다.

주님은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물었고,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하자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한 “내 이웃이 누구인가?” 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이웃과 강도의 차이가 무엇인가?

얼마 전 바르셀로나에 있는 교민들이 영사관을 설치해 달라고 서명하며 외무부로 보냈는데 허락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해 바르셀로나에서 한국 여행객들이 소매치기를 당해 여권을 분실한 사람이 1000명이 넘는데, 이들은 여권을 재발급 받기 위해 마드리드까지 와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영사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는 약 35km 정도로,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이며, 여리고는 해발 250m에 위치한 까닭에 “내려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골짜기가 많고, 길이 험해 강도들이 자주 나타나 사람을 해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주님은 율법교사에게 “누가 이웃인가?” 묻기 전 “누가 강도인가?”를 먼저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과 강도는 상관관계가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을 도둑이라 하며, 남의 것을 훔치기 위해 사람을 헤치는 자를 강도라 합니다. 강도는 사람을 물질이나 물건보다 더 하찮게 생각하는 자며, 사람을 섬김의 대상이 아닌 도구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입니다.

여리고의 길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물질을 취하고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도구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사람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도구나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청소하는 사람”, “심부름 하는 사람”, “돈벌이는 사람”으로 대할 때,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교사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너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강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강도이거나 강도로 태어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에 신문을 보면, 낮에는 착한 사람으로 보이다가 밤이 되면 강도로 변한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국 어느 때에 강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한국에 이런 말이 나돌고 있다고 합니다. “아들은 강도, 딸은 도둑, 며느리는 좀도둑, 손자들은 떼강도, 빚진 아들은 내 아들, 잘난 아들은 나라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강도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면, 가족도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길의 위험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옳게 보이는 율법교사도,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성직을 감당할 수 있는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고,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마존과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이 아니며, 바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오랜 친구,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죽하면 주님이 우리의 연약을 하시고 (마18:22)“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했겠습니까? 사람은 사랑하고 용서할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4:7)“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를 극복하는 길은 소극적으로 죄의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비우는 종교가 아니라 채우는 종교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마음에 악의 뿌리가 내리지 못하도록, 참된 이웃이 되도록 깨어, 성령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나에게 이웃이 없는 것보다 큰 비극은 없다.

주님은 본문에서 참 이웃이 아닌 사람이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제사장은 당시 최고의 지도자이며, 성직자입니다. 레위인은 아론계열의 제사장들을 도와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고 성전 기구들을 관리하고, 제사장들의 제사의식을 돕는 자들입니다. 유대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은 참 이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0-31절)“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절)“또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자를 보고 똑같이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주님은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웃이 누구인가?”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10:36)“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현재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바로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고,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에 이웃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의 집 아래 90세가 넘는 할아버지가 살고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켜 놓고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더운 날, 창문을 열어놓고 테라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눕니다. “무척 더운데, 건강이 괜찮으냐?”, “가족들은 잘 있느냐?” 인사를 나누면 그렇게 좋아합니다

1883년에 출생한 프랑스 여성화가 마리로랑생이 지은 “잊혀진 여인”이란 시가 있습니다. “슬픈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불행한 여자이며, 불행한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버려진 여자이며, 버려진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떠도는 여자며, 떠도는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쫓겨난 여자며, 쫓겨난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죽은 여자며,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잊혀진 여자다.” 죽음보다 큰 아픔과 슬픈 것이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금 번 올림픽 경기에서 한국선수나, 스페인선수나 동일하게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응원하고,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22:4)“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지니라.” “이웃의 소나 나귀가 어려움 당해도 못 본채 하지 말라.” 고 했다면 하물며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못 본 채할 수 없습니다.

(롬12:15)“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이것이 이웃입니다. 성도는 함께 즐거워 할 줄도 알아야 되고, 함께 울 줄도 알아야 합니다. 길 가다가 기쁜 일을 당했거나 힘든 일을 당한 성도를 만나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타인이 즐거움에 함께 즐거워하지 못하고, 타인의 슬픔에 함께 동참할 줄 모르면 내 믿음이 식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말하였습니다. 첫째,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둘째,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셋째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는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잠27:10)“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나에게 이웃이 필요한 것을 생각하면, 이웃에게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증오보다, 미움보다 더 나쁜 것이 무관심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잠깐 미워할지언정, 무관심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1.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본문을 “선한 사마리아인”이야기 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독교병원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이 가장 많으며, 자선 단체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 자선단체”가 가장 많습니다.

혹시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타인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거나 본 경우 자신이 크게 위험하지 않으면 타인의 위험을 제거할 의무가 있다.”라는 법입니다. 이 법은 오늘 본문을 근거로 제정된 것으로, 포르투갈, 스위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등의 유럽 국가의 헌법에 있습니다.

프랑스형법 제 63조 2항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조해 주어도 자기가 위험에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조해 주지 않은 자는 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 혹은 벌금에 처한다.” 독일형법 제 330조 “도움이 필수적이고 상당히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주지 않은 자는 징역 1년 이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옛 공산주의 국가들과 중국, 일본에도 동일한 법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만 이 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여름, 한국에서 여행 온 분들이 시내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저에게 도와 달라고 연락이 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 해 동안 소매치기를 당해 제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무려 7명이나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전화를 했기에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제 제 전화번호를 알았습니까? 물었더니 “대사관 전화번호를 걸었는데, 목사님이 받으셨습니다.” 대사관에서 비상 연락망 전화를 제 전화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경찰서까지 찾아 가서 여권 분실신고하고, 집으로 데려와서, 밥 먹여주고, 잠재워주고, 용돈 주고, 픽업까지 다 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3개월 동안 머문 사람도 있습니다. 3개월 동안 공자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영국까지 비행기 표 끊어 주고, 용돈까지 해서 보냈습니다. 제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흉내를 냈지만, 사실, 목사이기 때문에, 억지로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고,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끝내시면서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무책임한 존재가 아니라, 이웃에 대하여 책임을 맡은 자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참 좋은 이웃이었고, 참 좋은 친구였습니다. 주님은(요15: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정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타인에게 이웃은 고사하고, 피해와 아픔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 홀로 살아가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줄 것을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미움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