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고 신나는 이솝우화 가운데 “토끼와 거북이”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애들에게 얼마나 큰 보약이 되었으면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십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수록해 놓았을까 싶다. 로버트 짐러(Robert L. Zimler)교수 또한 일찍이 “이솝우화는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대단히 유익한 약이 될 수 있다.”라고 평가한바 있다.
목표(目標)가 우선되는, 이솝의 “토끼와 거북이”
“어느 날 거북이가 토끼에게 경주를 제안했다. 토끼는 기가 막힌 제안을 받았지만 기꺼이 경주를 수락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거북이는 느렸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결승점을 향해 기어갔다. 반면 토끼는 일찍 감치 앞서갔지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난 토끼는 힘껏 달렸지만 거북이는 이미 결승점에 도착한 후였다. 결국 경주에서 거북이가 승리했다.”
고대 그리스의 우화작가인 이솝(Aesop)에 대한 자료가 극히 부족하여 실존 인물인지조차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가 헤로도토스(BC 480-420)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6세기 사람으로 원래 노예였으나 뛰어난 학식과 지혜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만, 결국 델포이에서 누명을 쓰고 애석하게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솝우화가 기원전 6세기부터 지금까지 2500년 동안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거쳐 지금껏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읽혀지고 있는 것은 짧은 이야기 속에 넘치는 재치와 담긴 교훈이 아주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솝우화는 주로 동물을 의인화하여 간결하고 소박한 문체로 풍자하여 도덕적인 교훈을 비롯 지혜와 처세술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솝우화는 전적으로 이솝의 독창적인 산물이기보다 후대 작가들이나 구전 등을 통해서 대부분 덧붙여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대로 “토끼와 거북이”이야기는 동양이나 한국에서 경쟁과 목표 달성이란 두 가지 과제를 놓고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주마가편(走馬加鞭, 잘 달리는 말에게 채찍질하기)용으로 안성맞춤으로 자주 인용되는 우화이다. 일반적으로 “토끼와 거북이”이야기는 “자신의 실력만 믿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보다 노력하는 사람이 더 낫다.”라고 하든지, “약삭빠르게 재주를 부리는 것보다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 “토끼와 거북이”이야기는 우리와 정반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거북이는 잠을 자고 있는 토끼를 외면하고 혼자 가버렸기에 거북이가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상대의 불행을 유익의 도구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보통 동양인의 사고방식은 과정보다 목표를 우선시 하는 경향이 많지만, 서양인은 목표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이유로 서양인들은 나태한 토끼보다 정직하지 못한 거북이가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똑같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이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생존(生存)이 우선되는, 라 퐁텐의 “토끼와 거북이”
동양에서는 대체로 토끼에 대해서 부정적인 편이다. 중국 춘추시대에 유래된 고사성어 “토사구팽(兎死狗烹)”은 토끼가 잡히고 나면 충실했던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잡아먹게 된다는 뜻으로, 곧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가 없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토끼는 “교활한 토끼”를 말한다. 또한 토끼가 죽으니 여우가 슬퍼한다는 “토사호비(兎死狐悲)”란 같은 동류의 불행을 슬퍼한다는 말로, 여기에서 토끼는 강한 자에 대하여 약자를 뜻한다. 그리고 “토영삼굴(兎營三窟)”이란 말은 토끼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세 개의 굴을 파놓는 것을 뜻하는 말로, 이때 토끼 역시 “교활하다.”란 뜻을 담고있다.
유럽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은 17세기에 프랑스 우화작가 라 퐁텐(La Fontaine, 1621-1695)의 우화집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라 퐁텐은 우화를 통해서 백성들을 외면한 채 사치와 호화생활에 빠진 왕족과 귀족들을 우회적으로 고발했다. 나아가 실제로 사자처럼 절대 왕권을 휘둘렀던 루이 14세와 여우나 원숭이 같이 간교한 관리들을 각종 동물로 비유하여 원색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라 퐁텐은 “토끼와 거북이”이야기에서 약삭빠르고 게으른 토끼와 혼자 도망치는 거북이, “개미와 베짱이”이야기에서 게으른 베짱이도 이를 박대한 개미도 은근히 비판하면서 생존에 허덕이는 백성들과 그 백성들을 사지로 내 몰았던 귀족들을 모두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 또한 그는 우화뿐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궁정에서 잘 보이려면 아첨꾼이 되어서도, 너무 솔직해서도 안 된다. 때로는 애매하게 대답해야 한다.(토끼와 같이)”
1668년, 라 퐁텐이 47세 때에 첫 우화집 “시와 우화집”을 발간했다. 이솝우화를 기본으로 하여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각색하여 약 240여 편의 우화집을 출판했다. 무엇보다 그는 작품이 완벽하다고 생각될 때까지 30여 년 동안 원고를 보완, 수정했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비록 우화의 대부분은 이솝이 원작자이지만 현대인의 구미에 시대에 맞도록 다듬고 각색함으로 저작권까지 모두 자신의 것으로 챙겼다. 프랑스 지성인들이 생존을 위해서 절대왕정 앞에서 모두 벙어리가 되었지만 라 퐁텐이 거침없이 쏟아낸 우화만큼은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공존(共存)이 우선되는, 몬테소리의 “토끼와 거북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몬테소리”는 아주 익숙한 말이다. 특히 미취학 아동이 있는 집에는 “몬테소리 교육법”, “몬테소리 교재도구” 등, 몬테소리라는 말이 붙은 유아교육과 관련된 책이나 도구가 한 두 개쯤은 있을 것이다. 몬테소리는 유아교육의 대명사처럼 사람들에게 불려지지만, 정작 몬테소리 교육의 핵심이 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몬테소리 교육은 놀이 감을 통해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법을 개발해낸 이탈리아의 의사며, 심리학자, 아동교육자였던 마리아 몬테소리(1870-1952)의 이름을 딴 교육방법이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이솝우화를 재해석하여 아동교육에 접목했다. 그는 “토끼와 거북이”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각색했다. “토끼와 거북이는 경주를 했다. 둘은 서로에게 유리한 길을 선택하게 했다. 토끼는 땅에서, 거북은 물에서 달리기로 했다. 땅에서는 토끼가 잘 달리지만, 거북은 물이 더 편하다. 그게 공평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솝의 우화에서 토끼와 거북이가 땅에서 경주하는 자체가 불공평한 것이다. 토끼와 거북은 각자 열심히 달렸다. 그런데 거북이는 한참 헤엄쳐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토끼가 보이지 않는다. 어, 토끼가 어디 갔나? 보니 토끼가 주저앉아 낑낑대고 있는 게 아닌가? 왜 저러고 있지? 이솝우화에서라면 당연히 거북이는 혼자 헤엄쳐 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거북은 토끼에게 되돌아갔다. 누가 이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토끼는 발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울부짖고 있는 게 아닌가? 거북은 조심스럽게 토끼의 발에서 가시를 빼줬다. 하지만 토끼는 통증 때문에 더 이상 달릴 수 없어 거북은 토끼를 등에 업고 헤엄쳐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배울까? 틀림없이 남을 배려하고 함께 행복해지는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이게 몬테소리 교육방법이고, 몬테소리 메시지다.
이솝은 “좋을 때는 내 것이라 해 놓고, 나쁠 때는 우리 것이라고 하지 말라.”, “불행한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욱 불행한 사람들을 보고 위안을 받는다.”라고 실제로 유익한 교훈뿐 아니라 우화를 통해 현대인에게 많은 교훈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곰의 포석-곰이 돌을 던지다.”란 우화에서 “무지몽매한 친구만큼 위험한 것이 없으며, 현명한 적이 오히려 낫다.”라는 교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우화도 적지 않다. 우화는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만병통치약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쓴 독이 많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