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고, 유럽과 아프리카가 교차되는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는 수백 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며, 이슬람의 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특히 711년에서 1010년까지는 코르도바에서, 1010년부터 1248년까지는 세비야에서, 그리고 1248년에서 1492년까지는 그라나다에서 그 절정기를 이루었다. 이 기간 이슬람이 남긴 대표적인 유산으로,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카테드랄”, 세비야의 “세비야 대성당”, 그리고 그라나다의 “알암브라 궁전”을 들 수 있다.
이슬람과 카톨릭이 동거한 코르도바
스페인어로 카톨릭의 대성당을 “카테드랄(Cathedral)”이라고 쓰고 발음한다. “카테드랄”은 교구장인 주교가 앉는 의자(cathedra)가 있는 곳, 즉 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반면 이슬람의 사원을 스페인어로 “메스키타(Mezquita)라고 부른다. 그런데 코르도바에 있는 카톨릭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메스키타-카테드랄”로 불려진다. 교회역사에서 카톨릭의 상징인 카테드랄을 “메스키타-카테드랄”이란 두 종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는 코르도바가 유일하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두 종교가 혼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이슬람이 코르도바를 침공하여 A. D. 600년 경 서고트족이 세운 성 빈센트 교회당 위에 785년에 이슬람의 사원인 메스키타를 세웠다. 이후 스페인이 코르도바를 재정복하면서 이슬람의 메스키타 위에 또 다시 카톨릭 대성당으로 개축하였다. 세상 모든 종교역사에서 이처럼 기독교 교회당의 터 위에 이슬람의 대사원과 카톨릭의 대성당을 차례대로 개축하여 동거(혼합)한 경우는 없다.
일반적으로 스페인 이슬람 건축양식을 “칼리프 양식”이라고 부른다. 처음 스페인을 점령한 이슬람은 서 코트족의 건축양식인 “모사라베 양식”위에 자신들만의 건축양식인 “칼리프 양식”을 첨가 시켰다. 그러다가 12세기 이후 카톨릭 지배하에 있던 무어족들이 “칼리프 양식”에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을 적절히 가미하여 “무데하르 양식”을 만들었다. 바로 코르도바 “메스키타-카테드랄”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856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메스키타-카테드랄”은 23,000평방미터에, 2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3번째로 큰 회교사원에 속한다. 건물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수백 개 기둥과 아치가 기하학적으로 이루어내는 정경은 안달루시아를 지배했던 이슬람 문화와 문명의 건축적 정점을 보여준다. 지금도 코르도바에서는 로마고딕, 비잔틴, 서고트, 페르시아, 이슬람, 기독교 등 다양한 건축양식들이 혼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많은 건축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사람의 동거와는 달리, 다양한 건축양식의 혼합, 특히 “메스키타-카테드랄”과 같은 종교건물의 동거(공존)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은 미적 감각을 넘어 종교적인 신비감을 자아낸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영국의 작가 제럴드 브레넌은 “메스키타 사원을 스페인 전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평가했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세계 역사 유적”으로 코르도바 “메스키타-카테드랄”을 꼽았다.
이슬람의 영광 위에 카톨릭의 영광을 덧입힌 세비야
비제의 “카르멘”,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무대로 알려진 세비아는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향한 출발지와 마젤란이 세계 일주를 위해 나선 출항지이기도 하다. 로마 바티칸과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세비야의 히랄다(La Giralda)대성당은 이슬람이 12세기에 지은 사원 위에 카톨릭이 1402년 건축을 시작하여 100년(1519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하였다.
성당 내부는 세비야를 이슬람교도로부터 되찾은 영웅 산 페르난도를 비롯한 역대 스페인 왕들과 콜럼버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그 중에도 세비야 대성당의 보물인 콜럼버스의 유해는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으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4명의 왕들이 그의 관을 들고 있는 상태로 안장했다.
711년 북아프리카 우마이야 왕조에 속한 베르베르족과 아랍인들로 이루어진 무어족들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와 이베리아 남부도시, 안달루시아를 점령한 후 당시 기독교 세력인 서고트 왕국을 몰락시켰다. 곧바로 우마이야 왕조는 756년 수도를 코르도바로 정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후 1031년 무어왕조 때는 수도를 세비야로 옮겼고, 1238년에는 나스르 왕조 때는 그라나다를 수도로 정하면서 안달루시아를 최대 도시로 발전시키며, 고유한 이슬람 문화를 정착시켰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 북쪽에는 레온, 카스티야, 아라곤 왕국과 같은 카톨릭 왕국들은 이슬람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여 영토를 회복해 나갔다. 결국 1492년 1월, 스페인은 이슬람에게 빼앗겼던 모든 땅을 회복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들을 영구적으로 추방하였다. 스페인은 이슬람으로부터 빼앗긴 땅을 회복한 후에 기독교의 신앙과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대성당에서조차 이슬람 사원의 형태와 색체를 의도적으로 고스란히 남겼다. 하지만 건물의 심장부마다 카톨릭을 상징하는 재단과 각종 문양을 새겨 넣었다. 그 중에 세비야 대성당을 상징하는 히랄다 탑은 이슬람의 첨탑(Minaret)위에 대성당의 종탑(Dome)을 세움으로 이슬람으로부터 빼앗은 카톨릭의 승리와 영광을 소리 없이 후대에 전하고 있다.
이슬람의 마지막 꽃 위에 핀, 알암브라 궁전
일반적으로 그라나다의 “알암브라 궁전”이라고 하면, “알암브라의 이야기”이란 책을 펴내 알암브라를 전 세계에 알린 워싱턴 어빙(1783-1859)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스페인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인 타레가(Tárrega, 1852-1909)의 “알암브라 궁전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을 기억하게 된다. 타레가의 “알암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라나다 알암브라의 애잔한 분위기와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라나다의 알암브라 궁전은 이슬람과 스페인의 빛과 그림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찾아가 보아야 하는 곳이다. 이슬람에게 알암브라 궁전은 패망으로 얼룩진 비운의 장소지만, 스페인에게는 독립과 승전의 땅이다. 이슬람은 마지막 보루였던 알암브라 궁전을 빼앗김으로 781년 동안 찬란하게 꽃피었던 영광이 한꺼번에 무너졌고, 스페인은 알암브라 궁전을 탈환하므로 781년 동안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게 되었다.
1492년 1월, 이슬람 나스르왕조의 마지막 보압딜(Boabdil)왕은 알암브라의 새 주인이 된 이사벨 왕과 페르난도 왕과 조약을 맺고, 알암브라궁전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알암브라 궁전은 낙원(樂園)과 흐르는 물을 결합시킨…에덴동산을 구현한 것으로, 이런 곳은 이 지구 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기에 스페인의 시인 이카자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그라나다의 소경이다.” 란 말로 알암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반면 이슬람의 손에서 그라나다를 되찾은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무엇보다 알암브라 궁전을 무척 사랑하였고, 복원하여 이곳에 묻히길 소망했다. 그러나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했지만, 1521년 준공식과 함께 두 왕의 유해를 이곳에 안치했다.
스페인의 역사에서 1492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1492년은 내부적으로 이슬람 세력을 쫓아내면서 독립을 쟁취하였고, 동시에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통일하여 스페인 왕국이 세워진 해이며, 그리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므로 정복시대를 열게 한 해이기도 하다. 스페인은 1492년 그날의 영광을 다시 꿈꾸며, 영광의 500주년을 전 세계적으로 치른바 있다. 바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세비야 세계 박람회가 그들의 자축 무대였던 셈이다.